니클라스 루만 교수(Niklas Luhmann)는 1927년 독일 뤼네부르크 근교에서 태어나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공군보조병으로 복무하다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법학을 공부한 후 고향에서 판사를 지냈고 니더작센 주 문화부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1960년부터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파슨스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사회체계이론의 설계에 착수한다. 박사학위와 교수자격학위를 취득한 루만은 독일 사민당의 교육대중화 정책의 결실인 빌레펠트 대학교의 창설과 함께 1969년 사회학과 창립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는 사회학이론의 완성에 꼬박 30년을 바쳤고 매체과학, 정치학, 법학, 철학, 언어학, 인공지능 연구, 심리학과 교육학 그리고 환경과 생태학에까지 연구의 스펙트럼을 넓혀 무려 7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세계적인 학자가 된 루만은 엄청난 다작가였다. 그가 그럴 수 있는 힘은 ’우리 뇌의 한계를 보완해줄, 노트 기록 시스템을 만드는 법’을 ‘제텔카스텐(zettelkasten)’이라고 한다. 독일어로 제텔은 노트, 상자가 카스텐이다. 결국 제텔카스텐은 '메모상자'를 의미한다.
보통 1년에도 1편 논문을 쓰기 어려운 학자들이 많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메모상자
그는 일생 동안 9만 장이 넘는 메모를 기록하고 보관했다. 그는 어딜 가든지 메모할 수 있는 도구를 들고 다녔으며 좋은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즉각적으로 메모하곤 했다. 루만 교수는 이러한 메모를 토대로 남들보다 빠르게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평소 본인이 모아둔 메모를 활용하여 어떤 주제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기존 메모 바탕으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에 보관 중에 루만 교수의 메모상자
종이 인덱스 카드와 나무 박스를 사용한, 자신만의 지식 관리 시스템이었다.
책을 보다가 기억하고 싶은부분을 종이 인덱스 카드에 적는다.
이 때 그냥 베껴쓰면 안 된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골라, 자기 말로 요약해서 써야 한다.
뒷면에는 나중에 찾아볼 수 있게 출처를 적는다. 이 카드를 레퍼런스 노트(Reference note)라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때도 카드에 적어둔다. 이것은 플리팅 노트(Fleeting note)라고 한다.
1주일에 한번 정도, 쌓인 노트를 쭉 읽어본다. 여러 노트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아이디어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어떻게 연결되지?’
‘이 아이디어를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순 없을까?’ ‘이 아이디어는 저 아이디어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떠오른 생각을 다시 인덱스 카드에 적는다. 이걸 퍼머넌트 노트(Permanent note)라고 한다.
퍼머넌트 노트는 이미 있는 퍼머넌트 노트와 연결한다. 서로 관련있는 노트에 번호를 매긴 뒤, 박스 안에 바로뒤 순서로 끼워넣는다.
언뜻 보면 비슷한 메모상자 같다. 하지만 메모의 분류와 보관법이 다르다. 루만 교수는 메모를 마치 컴퓨터가 데이터를 저장하는 것과 유사한 메모 저장법을 활용했다. 루만 교수는 메모 종이마다 이처럼 일련번호를 적어놓아 자료들이 서로 연결된 구조를 만들어놓았다. 이는 난잡한 엑셀보다 일정 형식에 따라 정리된 엑셀이 많은 데이터를 활용하기 편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나중에 글을 쓸 때가 되면 박스를 열어 노트를 읽어본다. 노트를 조합하고, 아이디어를 추가해 글의 개요를 잡는다. 메모지를 분류하고, 주제별로 정리하면 그 자체로 한권의 훌륭한 책이 되었다.
재미 있는 것은 다산 정약용이 썼던 정독(精讀), 질서(疾書), 초서(抄書) 기법과 유사합니다.
정독(精讀)이란 뜻을 새겨가며 글을 아주 꼼꼼하고 세세하게 읽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 달아나기 전에 퍼뜩 적는 것을 질서(疾書)라고 한다. 질주(疾走)는 빨리 달린다는 뜻이고, 질서(疾書)는 잽싸게 읽으면서 메모한다는 의미다. 책을 읽다보면 이런저런 생각이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 생각들이 달아나기 전에 종이에 기록하는 것이다. 묘계질서의 준말로 묘계는 번쩍하면서 깨닫는 것을 말한다.
책을 읽다가 중요한 구절이 나오면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베껴쓰기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것은 좋다고 무작정 베끼는 게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목적에 부합하는 것만 베끼는 것이다.
초서(抄書)란 책을 읽다가 중요한 구절이 나오면 이를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첫째, 메모상자법을 쓰면 글을 쓰기가 쉬워진다.
백지 상태에서 처음부터 글을 쓰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를 쓰려고 할 때 재료로 쓸 수 있는 아이디어 조합들이 항상 준비되어있다면, 좀더 쉽게 시작할 수 있다. 글의 개요를 잡거나, 주장에 근거가 필요하거나, 재미있는 사례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꺼내쓸 수 있다.
둘째, 메모상자법을 쓰면 창의적인 생각에 도움이 된다.
창의성을 논할 때 등장하는 것이 연결, 편집, 다르게 보기. 낯선 조합 등입니다. 없던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참신한 방법으로 연결하는 것이 창의성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메모상자법을 쓰면 모든 메모가 통합되면서 시스템적 사고를 하게 된다.
책, 논문, 기획서, 보고서 등 생산적인 글쓰기를 위해서 메모상자를 만들고 노션으로 정리하라.
옛사람들의 책상 곁에는 메모를 보관하는 상자가 따로 있었다. 메모가 쌓여갈수록 공부의 깊이도 더해갔다. 그러다가 틈이 나면 메모지를 꺼내 정리했다. 메모만 하면 쓸모없다. 혹독한 생각 훈련을 통해 후에 제자들도 나름의 역량을 갖춘 훌륭한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생각의 힘은 끄적끄적인 낙서에서 나온다. 의식하지 말고 손을 믿어라. 미루지 말고 그때그때 흔적을 남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