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행복조각

by 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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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 후엔 누릴 수 있는 호사가 하나 있는데 그건 고개를 위로 들지 않아도 하늘 볼 수 있다는 거다.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자 저 멀리 빗물이 고여있는 흔적이 보였다. 머리에서 보낸 신호가 도달하기엔 아직 이른 것 같은데 두 발은 벌써 그곳을 향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웅덩이에 가까워질수록 속도를 조절해 조금씩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빗물이 품은 하늘을 제일 예쁘게 보고 싶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각을 쟀다.


가로등 기둥과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이 비쳤다. 너무 선명한 이미지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 내 속을 어찌 알았는지 재치 있는 바람이 고여있던 물을 쓱 하고 살짝 흩트려 놓았다. 바람은 매끈하던 가로등의 기둥을 펜으로 쓱싹쓱싹 대충 문댄 것 마냥 자유를 주었고 오렌지빛의 하늘은 술에 취해 흔들리는 칵테일 잔의 담긴 듯 일렁이게 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봤는데 이미 일탈의 맛을 봐서 그런 걸까. 깨끗한 하늘을 보는 건 도수 약한 술을 입에 댄 듯 시시해진 뒤였다.


비가 내릴 땐 흠뻑 맞으며 해방감을 충전하고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소리를 채운다. 시간이 흘러 비가 떠난 자리의 흔적에선 자유로운 맛의 하늘을 눈에 담는다.


비는, 그래서 행복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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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결린 어깨를 풀려고 기지개를 켜는데 번개가 치듯 메시지 하나가 머릿속을 강하게 때렸다.


'나가야 해! 나가자!'


몸을 기립시킨 후 창고로 달려가 캠핑용 경량 의자 하나와 책 한 권만 달랑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많은 사람이 있었다. 저들도 분명 지친 일상의 찌든 때를 벗기러 온 사람일 거란 추측을 마음대로 들이켰다. 뒷사람의 한강 전망을 가리지 않으면서도 바람이 잘 통하는 자리를 골라 잔디 위에 의자를 펼치고 엉덩이를 쑥 밀어 넣었다.


'좋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인간이란 동물은 이렇게나 간사하다. (아니, 나만 그런 건가?) 집에 있으나 공원에 있으나 앉아 있는 건 똑같은데 장소가 바뀌었다고 이렇게나 좋아할 일인가? 이젠 왼손에 꼭 쥐고 왔던 책을 펼칠 차례였다. 189 페이지를 펴고 두 눈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젠장...'


기분이 잔뜩 고양된 탓인지 눈동자에서 활자가 자꾸만 이탈하고 만다. 망했다 싶어지자 책을 덮고 양안을 활용해 시야각을 최대한으로 넓혀 사람 구경을 시작했다. 초점이 맞은 120도 정도 되는 공간 안엔 가족, 친구, 연인으로 보이는 무리가 여럿 있었다. 그들은 떡볶이나 샌드위치 따위를 먹고 있었고 모두 순수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고 지친 내색 하나 없이 에너지가 가득해 보였으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가득한 일상을 만나고 싶을 때 대단한 걸 떠올릴 필요가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내 곁에 있는 사람과 언제든 주문할 수 있는 평범한 음식을 가져다 두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게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진짜 행복 아닐까?


공원으로 나설 때는 비록 혼자였지만, 잔디밭 위에 앉아 있던 나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과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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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의 일상은 조금 단조롭게 변하는 중이다. 아니, 꽤 그렇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애초부터 대단히 다채로운 일상을 살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변주를 줄 수 있는 여유가 상당한 편이었다. 최근엔 그것들에 힘을 꽤 쓰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받지 못한 채 스치듯 사라지는 '행복'은 없었는지 되새김질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일명 행복 되새김질.


그렇다고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을 숙명이 된 것처럼 행동하고 싶진 않다. 잊지 않기 위해, 보듬어 줘야 할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뿐, 그것이 억지로움과 연결되면 진짜 억지 행복이 되기 때문이다.


'진짜'라는 건 만나기엔 힘들어도 평생 가지만 '가짜'는 쉽게 다가오며 빠르게 소멸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나의 의지이기도 한 이유로 인해 (글로 다 옮길 수는 없는 이유로...) 나의 하루의 변화가 생겼고 하루가 쌓여 몇 주 동안 이어지고 있다. 두 팔을 벌려 변화를 반가워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반복되는 일상에 안주하고 싶은 나이도 아니다.


삶에 변화가 생겼다면 새로운 움직임 속에서 다른 모습의 행복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당장은 적응이 안 된 것일 뿐. 분명 만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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