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번째 주, 책을 좋아하면 생기는 일들
이번 주는 책이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한 주였다.
수요일, 2024 서울국제도서전이 막을 올렸다. 1일 차와 2일 차 이틀 연속 둘러볼 생각으로 얼리버드 1차 티켓을 5월 중순에 미리 구매해 놨었다. 얼리버드 가격은 6천 원. 그러나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마침 도서전 이틀 연속 중요한 일정이 생기는 바람에 결국 8천 원을 내고(얼리버드 2차 가격) 3일 차인 금요일이 되어서야 국제도서전을 방문할 수 있었다. 도서전 방문은 2018년 이후 6년 만이었다.
'대형 출판사의 위엄'
입구부터 들어서자 웅장한 대형 출판사의 부스부터 눈에 띄었다. 저마다 출판사의 아이덴티티를 뚝심 있게 지키려는 듯 보였다. 시그니처 컬러가 겹치지 않는 건 출판사 마케터들끼리 협의한 것인지, 공유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쨌든 대형 출판사 부스엔 사람이 제일 많이 몰려있었다. 인산인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법했다. 우리나라 독서율이 역대 최악이라고 했는데 책 보는 사람들 모두가 여기에 모인 것 같았다. 여담이지만 국제도서전 다녀온 다음 날(토요일) 저녁에 민음북클럽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니 내가 갔던 금요일은 양반이었던 거였다. 예약표 대기줄부터 50분-1시간 웨이팅은 기본에 사람이 미어터져서 도무지 구경할 수 없었다는 후문이었다. 입장하기 전부터 기 빨려서 막상 도서전은 30분 만에 나와버렸다는 인증(?) 글이 허다했다. 이런 푸념 섞인 글을 보고 나니 '아... 금요일에라도 다녀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네'라는 위안이 몰려왔다. 타인의 힘듦이 나에겐 위안이 되었다 생각하니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도, 인간의 간사함을 다시 한번 새기는 순간이었다.
'독립출판사 찾기'
스스로 정한 이번 국제도서전 미션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 성향, 감성과 잘 맞는 독립출판사를 찾는 것. 그래서 대형 출판사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게 내심 나쁘지 않았다. 그만큼 주변부는 여유로울 테니.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주변 부스도 그렇게 여유롭진 않아 당혹스러웠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어디서 다 나타난 건지 모르겠단 생각만 계속했던 것 같다. 대부분은 20-30대 여성들이었다. 도서 시장에서 이들의 파워가 대단하다고 하더니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출판사 '바이블랭크'
정신을 차리고 부스를 찬찬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약 2시간 정도 되었을까. 그때 눈에 띄는 출판사가 한 곳 보였다. 여기는 부스라기도 뭐 한 매대 같은 곳들이 한데 모여진 곳이었는데, 처음에는 굿즈 파는 곳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두 각각 개성을 뽐내고 있는 독립출판사의 홍보 공간이었다. 대형 출판사의 웅장한 규모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지만 그들에게 뒤지지 않는 개성과 진정성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출판사 '바이블랭크'를 만났다. 테이블 위엔 몇 권의 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사진집임을 알 수 있었다. 괜찮은 사진집을 찾아 오랜 시간 헤매어서 그런지 가장 반가운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샘플 북을 집어 들자, 홀로 계신 분의 책 설명이 마치 도슨트처럼 전해졌다. 알고 보니 출판사 대표이자 편집장님이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친절하고 밝았지만 책을 소개할 때 뿜어 나오는 목소리는 참 단단했다.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펴냈는지 알 것 같았다.
책을 펼치고 찬찬히 사진을 들여다봤다. 황효철 작가의 [시선_벽]이란 사진집인데,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벽 사진만 찍은 것이었다. 평소 벽을 자주 찍는 내게도 흥미가 느껴져 이 사진집을 구매했다. 다른 책들도 둘러보았는데 사진집만 내는 출판사는 아니었다. 호기심에 출판사 이야기를 잠시 청해보니, 디자이너, 건축가, 사진작가들과 협업해서 책을 내고 있고, 건축이 일상에서 갖는 고민과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펴내는 곳이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공을채 대표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첫인상보다 호감이 더욱 가서 앞으로도 계속 바이블랭크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생각이다.
출판사 '별빛들'
최소한의 목적을 이루었으나 이대로 떠나기는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 다시 본 전시장으로 향해 주변에 있는 작은 부스들을 돌아봤다. 혹시 그냥 지나친 출판사가 있을 것 만 같아서였다. 몇 발자국 딛지 않았는데 심플한 책표지와 어울리는 에세이로 보이는 듯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무언가에 끌린 듯 이광호 작가의 '도쿄와 생각'을 집어 들었다. 부스 안에 계신 남자분의 밝은 표정과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분에게 간략한 책소개를 듣고 페이지를 넘겼는데, 어느새 30페이지 넘게 몰입한 채 글을 읽고 있었다. '이건 사야겠다.' 앞에 계신 분에게 결제를 요청하고 그 짧은 시간에 다른 책도 들춰봤다. 처음 느낌처럼 문학을 출판하는 독립출판사였다. 특히 표지 디자인은 완전 내 취향이었다.
국제도서전을 다녀온 후 블로그에 이 날 구매한 책과 이야기를 짤막하게 올렸다. 그때 이웃 한분이 이광호 작가의 팬이라며 내가 '도쿄와 생각'을 구매한 것에 반가움을 표현하셨다. 신기했다. '나는 잘 모르는 작가지만 어떤 분에게는 큰 영향을 주고 있었구나' 싶었다. 궁금증이 생겨 이광호 작가의 인스타에 들어가 봤다. 순간 멈칫했다. 인스타에 있는 이광호 작가라는 사람이 아까 나에게 책을 건네주고 설명해 준 사람이었다. 근데 왜 본인의 책이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아니면 내가 비슷한 사람을 착각한 건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궁금해, 동일 인물이 맞는지 DM을 보냈는데 한 시간 후 답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네^^ 맞습니다. 수많은 출판사 중에서 저희 출판사를 찾아 주시고 도쿄와 생각 선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도서전이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라면서 도쿄와 생각도 윤기님에게 좋은 책이 되길 바랍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처음에는, '그랬으면 싸인이라도 해주시지'라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어느새 그의 마음이 혹시 이런 건 아니었을지 생각했다. 아마도 스스로 이 책의 작가임을 밝히면 책에 몰입한 독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혹은 괜히 부담을 주는 게 아닐까 란 마음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싸인이야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받으면 되는 것이고, 어쩌면 오롯이 이 책이 좋아 선택한 것이 더 순수해질 수 있어 좋았다. 그런 덕분인지 이광호 작가님을 비롯해, 출판사 별빛들의 행보도 응원하고 싶어졌다.
2024년 나의 서울국제도서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기에 출판사도 있는 것이고, 출판사가 있기에 독자가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독서율이 바닥이니 출판계는 항상 어렵다고 하는데, 대형 출판사도 허리띠를 졸라매는 요즘엔 독립출판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이번 국제도서전에서 만난 독립출판사 '바이블랭크'와 '별빛들'이 내년에도 서울국제도서전에 참가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주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