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번째 주,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기
[저 남자]
하얀 공간엔 세로줄이 1초 단위로 깜빡이고만 있을 뿐 어떤 글자도 보이질 않는다. 이 남자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멍하니 모니터 화면만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집어 들더니 한 모금 깊게 들이켠다. 컵 안에서 움직이는 얼음의 양과 위아래로 크게 움직인 남자의 목젖이 사라진 커피의 양을 짐작게 한다. 목이 많이 탔나 보다. 빨대를 사용하지 않는 걸 보면 성격이 급하거나 독특한 취향을 가진 것 같다. 아니면 친환경주의자인가? 컵을 내려놓은 남자는 다시 모니터가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다. 어느새 양손은 키보드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드디어 남자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뭔가를 만들어내나 싶더니 몇 획 나가지 못한 글자는 다시 뒤로 돌아오고 말았다. 공간은 다시 하얀색으로 바뀌었고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남자의 한숨 소리와 묘하게 합을 맞춘다. 답답한 걸까? 글이 써지지 않아서? 한숨을 내쉰 후 얼굴을 감쌌던 손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글을 쓰지 않아도 눈은 모니터를, 손은 키보드 위에 있어야 하는 건가 보다. 남자가 연한 핑크색 모자를 벗고 왼손으로 이마를 훔친다. 더웠던 걸까? 가을 날씨의 밖, 쾌적한 카페 안의 온도, 오른편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움이란 단어와는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다. 그렇다면 이마에 뭐가 묻었던 걸까? 모자를 벗은 남자는 이제 손으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한다. 더운 게 맞았던 거였다. 그래. 남자는 뭔가 불안정한 상태인 건가 보다. 그러니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마에 땀까지 나게 된 거였을 거다. 모자를 벗고 엉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던 남자는 깍지 낀 양손을 머리 뒤로 넘긴 채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저들을 왜 쳐다보는 걸까? 지나가는 사람이 자길 보는 걸 안다면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언젠가 어떤 작가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지나가는 사람을 관찰하며 캐릭터 연구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저 사람도 작가인 걸까? 어떤 작가일까? 만약에 작가가 맞다면 영화나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일 가능성이 높겠단 생각이 든다. 뭐지?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다시 모자를 눌러쓰더니 손을 바삐 움직인다. 제법 속도가 붙어서 그런지 키보드를 타격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온다. 이 남자... 이제 뭔가 쓰려나 보다. 어떤 글이 써지고 있을까?
[이 남자]
빌어먹을. 노트북 화면에 커서가 언제부터 깜빡이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다. 어떤 글을 쓸까? 이번 주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뭔가 글감으로 풀어내고 싶은 게 떠오르질 않는다. 그냥 이번 주엔 다른 걸 써보고 싶은데 그게 뭔지 나도 모르겠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머릿속이 숙취로 가득 찬 것처럼 뜨겁다. 온도를 빨리 낮춰야겠다. 우측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컵을 손에 움켜쥐려는 찰나였다. 깜빡하고 빨대를 갖고 오지 않았다. 단체 손님 탓에 의자 뒤 공간이 빡빡해져 일어나기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그래. 얼음이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마시면 되니까 괜찮다. 앗! 젠장. 얼음이 미끄러지며 차가운 커피가 쏟아지는 걸 입으로 겨우 받아냈다. 입안으로 쏟아졌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아끼는 티셔츠에 쏟을 뻔했다. 놀라서 그런지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다. 오늘은 뭔가 쉽지 않은 날이다. 그냥 글이나 쓰자. 이번 주에 있었던 일들을 한 줄씩 적기 시작했다. 아니다. 이건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다. 모두 지워버려야겠다. 화면은 다시 백지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잠깐. 쏟아지는 커피를 급하게 받느라 놀란 탓일까? 땀이 나기 시작한다. 이 날씨에 무슨 땀이람? 하... 가지가지한다 진짜. 아끼는 모자에 땀이 배면 곤란한데... 연한 핑크색 모자를 얼른 벗어 왼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 냈다. 모자를 벗었더니 머리가 엉망이다. 몸과 마음이 가지런해야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단 엄마의 말이 떠올라 단정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모니터를 보려는데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탓인지 목이 아프다. 스트레칭을 할 겸 고개를 들었다. 창밖을 보는데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려주며 쌓인 피로감을 풀어냈다. 스트레칭 덕을 본 것일까? 순간 글감이 생각났다. 그래. 오늘은 이거다!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던 저 남자의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동공이 커지자, 그제야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아차! 모자 써야지. 모자의 로고가 정중앙에 오도록 잘 맞춰 쓴 후 손을 키보드로 가져갔다. 이제 저 남자와의 이야기를 신나게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