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라떼파파(1)

반(半)픽션 <슈퍼맨은 없다_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by 융글

1. 이름 : G

- 직업 : 중소 제조기업 영업직원

- 자녀(연령) : 남아1(1세)

- 주양육자 : 아빠(G)

- 기타 : 지혜의 이웃



"주형아, 빨리 나와!"

정신없이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시간이 빠듯할 것 같은 다급함에 아들 주형을 소리쳐 채근해 보는 지혜였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가족 셋 모두 알람을 듣지 못해 월요일부터 늦잠을 자 버린 것이다. 이번주 일요일에는 무조건 일찍 자야지, 매번 어기는 계획을 다급한 와중 세워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집게핀으로 틀어 올리고 롱패딩으로 잠옷을 애써 감추며 닿는 대로 크록스에 발을 욱여넣고 집을 나선 지혜는, 엘리베이터를 타서야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급한 일 있는 듯 주형만 유치원 셔틀에 얼른 태워 최대한 다른 엄마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집으로 빠르게 들어가야겠다, 머릿속으로 미리 셈하며 아직 잠에서 덜 깬 채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주형과 빨리 내릴 수 있도록 문 바로 앞에 자리해 섰다.


'딩동-'

엘리베이터가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곧장 다시 멈춰 몇 층인지 시선을 올려다보니 14층이었다. 지혜는 15층 거주자였다.

문이 열리자 지혜와 같은 롱패딩에 네이비색 크록스를 신고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성인남성이 유모차를 끌며 엘리베이터에 입장했다.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유모차의 입장에 지혜와 주형은 구석자리로 비켜섰다. 들어오는 방향으로 보아서는 지혜의 바로 아래층인 듯했다.

최근 아래층이 이사를 오면서 이웃이 바뀐 건 알고 있었지만 얼굴을 실제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이사를 간 것도, 온 것도, 사다리차 두 대의 소음으로 어렴풋 알아챘다. 예전엔 이사를 간다며 작별인사를 하기도 하고, 이사를 왔다며 떡 같은 걸 돌리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이제 그런 문화는 점차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파트에서의 인간관계를 갑을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눈다면 갑은 아래층, 을은 위층일 터. 해서 지혜는 슈퍼을로써 아래층과의 갑작스러운 엘리베이터 동행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운동장 뛰듯 집안을 뛰어다니던 주형과 발이 답답하다며 슬리퍼를 신지 않고 망치발로 걸어대던 남편의 거친 뒤꿈치를 생각하니 얼굴이 빨개지기까지 하는 죄책감이 급속도로 몰려왔던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 같은 차림새로 첫인사를 하기엔 적절치 않은 듯도 했다. 이 모든 복잡한 마음을 담아 가벼운 목례로 인사하자니 상대방도 지혜를 향해 보일 듯 말듯한 목례로 화답했다. 상대의 조용한 화답에 지혜의 죄스러웠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편해졌다.


기왕 인사를 한 김에 평소의 소란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할까, 이사 오셨냐고 알은체를 하면 상대가 불편해하진 않을까 고민 중인 지혜였다. 어색한 적막 속에서 유모차 속의 아이가 무엇이 답답한지 찡얼 대기 시작했고, 아래층 아저씨는 아직은 육아가 미숙한지 조금은 어쩔 줄 몰라하며 아이를 달랬다.

"건아, 다 왔어. 조금만 참아. 곧 나갈 거야. 떡뻥 줄까?"

아저씨의 떡뻥 회유에 그런 걸로 달래선 안될 텐데, 라며 지혜는 약간의 마음속 오지랖을 펼치고는 유모차 안을 슬쩍 쳐다보았다. 돌이 갓 지난 듯한 아이가 자신을 사방으로 옥죄고 있는 안전벨트가 불편한지 연신 그것을 쥐어뜯고 있었다. 유모차 손잡이에는 어린이집 가방이 걸려 있었는데, 빨간색 동그란 무당벌레모양의 그 가방은 주형도 메었었던 눈에 익은 것이었다. 주형이 다니던 어린이집을 다니는 모양이었다. 어색한 공기 속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던 차, 작은 유아가방에 혼자만의 공감대가 생긴 지혜는 용기를 얻어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 이사 오신 아래층 맞으시죠? 1404호. 전 1504호예요. 아기가 너무 귀엽네요."

상대는 지혜의 갑작스러운 소개에 조금은 놀란 듯했다. 이내 아 네 라며 짧은 대답을 했고, 지혜는 지금이다 싶어 냅다 사과를 건넸다.

"저희가 너무 시끄럽죠? 아직 얘가 6살이라. 주의한다고는 하는데, 많이 시끄러우실 거예요. 너무 죄송해요. 주형아, 너도 얼른 죄송하다고 해. 안 그래도 한 번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아빠랑 어린이집 가나 봐요, 아고 귀여워라. 주형아, 얼른."

어리둥절한 주형의 머리를 찍어 누르는 동시에 유모차 속의 아이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조금은 과장되게 표정을 쥐어짜내며 주절대는 지혜를 상대로 1404호 아저씨는 얼굴이 빨개진 채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저희도 애 키우는 입장인데요 뭐. 아파트가 잘 지어져서 그런지 층간소음도 전혀 안 들려요. 더 뛰어도 돼요."

더 뛰어도 된다며 횡설수설하던 그는 마침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녕히 계세요,라고 지혜에게 애매모한 인사를 하며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찍어 눌린 머리를 긁던 주형이 조금 신나 하며 말했다.

"엄마, 저 아저씨가 더 뛰어도 된대. 들었지?"

지혜는 주형에게 꿀밤 먹이는 시늉을 하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체크하고는 아파트 정문을 향해 주형의 손을 잡고 내달렸다. 이상하지만 착한 아저씨구나, 층간소음 문제는 한시름 놓았다, 싶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G는 도망치듯 유모차를 끌고 나온 자신의 모습을 후회했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본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말을 뱉어내는 족족 바보같음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새로 이사 온 환경과 이웃이 적응되지 않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차를 끌고 출근해야 할 시간에 유모차를 끌고 어린이집을 향하는 생활이 여태 익숙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유모차에서 칭얼대는 아들 건이었지만, 달랠 생각은 없었다. 사실 둘만 있을 땐 규칙도 엄격하게 정해놓고 칭얼대더라도 훈육을 하지, 어쩔 줄 몰라하며 어르고 달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을때면 얼른 이 아이의 칭얼거림을 멈춰야겠다 싶어 평소 안 쓰던 수단들을 쓰게 되는 것이다. 행여나, 아빠가 애를 보니까 그렇지, 라던지 아빠가 미숙하네,라는 이야기를 들을까 항상 조심하던 탓이리라. 애초에 떡뻥도 집에서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오늘도 아빠가 오셨네, 건이는 좋겠다. 아빠가 다정해서. 이런 아빠 없어, 건아."

아직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건이를 향해 말하는 어린이집 원장의 인사에 G는 그저 어색한 웃음으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칭찬이라고 하는 것들이 아직은 G에게 모두 불편하게만 들렸다.



"G차장 미쳤어? 육아휴직을 내겠다고? 우리 회사 설립이래 남직원이 육아휴직 낸 사례는 없다는 거 몰라?"

처음 G가 회사에 육아휴직을 내겠다고 팀장에게 먼저 넌지시 계획을 알렸을 때, 팀장은 목까지 시뻘게져서는 열을 올렸다. 그렇게 열을 낼 일인가 싶었다. 신입사원시절부터 함께 했던 팀장이었기에 사정을 충분히 봐주리라 믿었는데. 7년 전, 억 단위 매출이 G 때문에 엎어졌을 때도 팀장은 이 정도로 열을 내지는 않았다.

"내가 G차장 싫어해서 하는 소리가 아냐, 다 애정이 있으니까 하는 소리라고. 다시 생각해 봐, 지금 육아휴직을 내겠다는 건 G차장이 그만두겠다는 소리랑 같은 거라고."

그만두겠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솟아올랐지만 뱉어낼 순 없었다. 어떤 말이 돌아올지 뻔히 알고 있었으니까.


팀장의 부정적 의견은 예상했다. 회사에서 남자직원이 육아휴직을 쓴 전례가 없다는 것도 익히 숙지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G의 결정도 마냥 쉬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G의 아내 역시 육아휴직이 어려운 회사에서 9개월의 휴직기간을 어렵게 따낸 뒤 복귀가 코앞인 상태였다. 3개월 정도 더 써서 1년을 채우면 어떻겠냐 상의했지만, 회사도, 아내도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9개월은 아내의 회사에서 그에게 최대한으로 배려해 준 기간이었고, 아내 역시 아이를 돌보며 정신과를 갈 만큼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의사로부터 아이와 분리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터였다. G의 휴직밖에는 답이 없었다.


"아니, 그럼 와이프 쪽 친정식구들이 있을 거 아냐."

팀장은 그런 것도 G가 미리 알아보지 않았다는 듯 딴에는 해결책이랍시고 제시했다.

"장인 장모님은 외국에 계셔서요."

팀장은 한숨 쉬며 다음 카드를 내밀었다.

"그럼 자네 부모님은?"

"제가 고등학생 때 두 분 다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일전에 두어 번 말씀 드린 듯한데..."

팀장은 이번엔 아차 싶었는지 아 미안 그랬었지, 하며 어물쩍 사과했다. 그러더니 다시 궁리하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지금 9개월 됐다며, 어린이집으로 보내면 되겠네. 요즘 어린이집에서 케어 잘해줘. 우리 애 둘도 다 어린이집에서 키워줬어. 잘 컸어."

라고 제안했다. G는 이번에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도 분리불안이 심해서... 아무래도 지금 상태로 어린이집을 들어가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적어도 돌이 지나야......."

G의 흔들리지 않는 대답에 팀장은 다시 열이 오르는 듯했다. 회의실 책상을 손가락으로 드르륵 두드리며 참 나, 허 참, 쯧, 같은 한탄 섞인 혼잣말을 중얼대더니 이젠 도저히 제시할 해결책이 없는지 냅다 G를 향해 쏘아댔다.

"사정없는 사람이 어딨어? 그런 사정 하나하나 다 봐줬다가는 어디 회사가 굴러가겠어? 우울증이고 분리불안이고 다 약해 빠져서 하는 소리라고. 하면 다 돼. 왜 안돼. 우린 다 그렇게 키웠어. 아니 그리고. 엄마가 애를 못 보면, 친정 부모라도 와서 봐야지. 딸이 애를 못 본다는데. 딸이 우울증이고 손주가 분리불안이고 뭐고 어린이집도 못 간다는데 비행기라도 타고 날아와야 되는 거 아냐?"

점점 열이 오르는 팀장을 상대로 G도 조금씩 화가 차올랐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팀장은 내내 묵묵히 말하던 G의 화난 낌새의 어조에 다시금 되물었다.

"뭐?"

"제가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빠가요. 엄마가 못 보면 친정부모님이 보는 게 아니라, 아빠가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엄마가 못 보지 않더라도 당연히 아빠나 엄마 둘 중 하나가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부모 아닙니까. 아비부, 어미 모, 부모요. 조부모나 어린이집이 아니라요. 그러니까, 제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팀장은 곧 터질 것 같은 얼굴로 G를 빤히 쳐다보다 테이블 위 다이어리를 휙 집어서는 부러 큰소리가 나게끔 회의실 문을 있는 힘 다 해 쾅 닫고 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G의 입에서는 나지막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팀장과의 면담을 가장한 전쟁 뒤에는 이사와, 이사와의 말씨름 뒤에는 인사팀과의 관문이 남아있었다. 인사팀이 작성해 두었던 육아휴직 가이드를 곱게 프린트해 면담에 참여하며 들이밀었더니, 이상하게도 그들은 그들이 썼던 가이드를 부인했다. 다 아시지 않느냐, 가이드는 가이드일 뿐이다, 실무는 다르다,라는 말들로.

미리 공부해 둔 개정된 법들과 신문기사들을 제시했을 때는, 마치 그를 세상물정 모르는 답답한 사람으로 치부했다. G차장님 그렇게 안 봤는데, 순진하시다, 그런 법들은 공공기관과 대기업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라며.

달래기도 했다가 화를 내기도 하던 그들은 변할 것 없는 G의 태도 앞에 협박으로 면담을 종료했다.

"다시 복직하셨을 때, 웃으면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3개월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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