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발주자들은 어떻게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았나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공유합니다.
디자인 토크쇼 쉑 댓 브디브디
안녕하세요. 드디어(...!) 돌아온 융융김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표현을 익히 들으며 자라왔어요.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유리하다는 말이죠.
대량생산과 유통이 본격화된 19세기 후반부터 현대 브랜드의 개념이 시작된다고 본다면 일찍 일어난 브랜드는 얼마나 많을까요? 하지만 차고 넘친다 생각했던 시장에 느즈막히 나타나 살아남은 브랜드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신생 카테고리를 개척하거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혁신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포화시장에서 그들은 어떤 생존방식으로 살아남았을까요? 오늘은 그러한 세 가지 브랜드를 소개해 볼게요!
사실 이번 주제를 쓰게 된 건 이 브랜드 때문이었습니다. TWG, 혹시 몇 년도에 런칭되었는지 아시나요? 저는 이것을 알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2008년 런칭이라고?!
TWG 하면 유럽풍의 헤리티지가 느껴지는 매장 인테리어와 우아하고 고전적인 틴 케이스가 먼저 떠오릅니다. 저에게 TWG는 역사가 족히 100년은 됐을 것 같은 명품 티 브랜드 이미지였어요.
TWG 설립자인 모로코계 프랑스인 타하 북딥(Taha Bouqdib)은 어렸을 때 중국 녹차를 맛보고 차와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냐면, 가업을 뿌리치고 프랑스 차 회사에서 15년 동안 근무하며 휴가는 인도나 일본의 찻잎 재배 농장에서 보냈을 정도.
타하 북딥이 럭셔리 차 브랜드를 개발하겠다 결심했을 때, 공동창업자인 마노즈 무르자니(Manoj Murjani)는 찻잎 한 장 안 나는 싱가포르에서 창업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문화교역의 중심지인 싱가포르의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인데요. 또한 세계인이 모여들고 고급 브랜드 소비율이 매우 높은 싱가포르에 '상류사회의 티 살롱' 컨셉이 통할 거라고 예상한 것이죠. 무려 1000만 달러(약 140억원)의 거대자본을 투자해 매장에는 대리석, 원목 가구, 금빛 도자기로 곳곳을 장식합니다. 그리고 런칭 직후 직면한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창업한 2008년 한 해에만 650톤의 차를 판매하며 그들의 예상을 제대로 적중시켰습니다.
TWG는 헤리티지 마케팅을 활용했습니다. 상표 속 1837는 TWG의 창립 연도가 아닌, 싱가포르가 무역항으로 지정된 연도라고 합니다. 차와 향신료 등 고급 미식의 교류가 활발해진 시기라고 해요. TWG는 이런 상징적인 숫자를 내세움으로써 스스로를 마치 180년도 더 된 브랜드처럼 보이게 만들었어요. (최근에는 1837 숫자를 점차적으로 제거하고 있다고 하네요.)
게다가 하이엔드 호텔과 백화점, 면세점 등 프리미엄 로케이션 위주로 입점하여 럭셔리 이미지를 강화했습니다. 이 브랜드 정말 치밀하게 전략적이잖아? 이뿐만 아니라 티 살롱 안에서 향유하는 고급화된 티타임, 차 소믈리에의 전문적인 응대, 클래식한 티 웨어 등 모든 고객 접점에서 럭셔리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약간 속은 기분은 지울 수 없지만 치밀한 전략을 통해 TWG는 2008년보다는 1908년 런칭이 더 어울리는 우아한 고전 스타일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합니다. (뭔가 두바이 '스타일' 초콜릿 같다) 덕분에 싱가포르의 첫 명품 브랜드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프리미엄 차 브랜드들의 런칭 연도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무려 300년 선배와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대단하잖아~
위스키 하면 아마도 스코틀랜드, 미국, 일본이 가장 먼저 떠오를 텐데요. 스카치 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는 기록상으로 무려 1400년대부터 위스키를 제조했다고 해요. 그리고 위스키의 이상적인 기후 조건으로는 무엇보다도 천천히 숙성이 가능한 서늘한 기후를 꼽습니다. 하지만 2008년 등장한 위스키계의 샛별 카발란은 더운 아열대 기후의 대만 위스키예요.
카발란의 데뷔전, 정말 화려합니다. 2010년 스코틀랜드 블라인드 테이스팅 그랑프리에서 전통 스코틀랜드 위스키들을 제치고 당당히 1위를 해요. 위스키 불모지라고 생각했던 대만 위스키가 챔피언을 차지하다니, 세간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언론들은 카발란의 역사적 승리를 이렇게 표현했대요.
Scotch Whisky beaten by Taiwanese outsider!
스카치 위스키, 대만의 이방인에게 패배하다!
이것을 기점으로 카발란은 세계적인 품질을 인정받아 전세계적으로 인지도가 급상승하게 됩니다. 카발란은 주류가 말해오던 정통도, 역사도, 이상적인 기후도 없었어요. 비주류의 비전통적 위스키였죠. 하지만 그 '비주류성'이 이 브랜드를 특별하고 비범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변방에서 탄생한 다크호스의 역전서사, 왠지 짜릿하지 않나요? 마치 북산이 전국 최강의 산왕을 꺾었을 때의 전율!
카발란이 '더운 나라 위스키'의 위상을 세계 무대로 끌어올린 후 대만뿐만 아니라 인도, 호주 등 뜨거운 나라의 위스키가 세계 주류시장에 더 당당히 뛰어들게 됩니다. 위스키 제조에 불리하다고 여겨졌던 고온의 날씨는 더이상 약점이 아닌 빠른 숙성이라는 무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더운 나라의 위스키는 시간 대신 기후를 담는다는 이야기가 생겨났을 정도예요.
자, 카발란의 실제 입지도 확인해 보아야겠죠? 공신력 있는 주류 저널인 Drinks International에 따르면 카발란은 2024년 Bestselling Brands 부문에서 4위, Top Trending Brands 부문에서 3위를 차지했습니다.
https://drinksint.com/news/fullstory.php/aid/10997/Brands_Report_2024:_World_Whiskies.html
프랑스어로 '연구실(Le Laboratioire)'을 의미하는 르 라보(Le Labo)는 2006년 런칭된 실험실 컨셉의 니치향수 브랜드입니다. 르 라보가 등장할 당시, 샤넬, 디올 등 명품 패션 하우스의 전통 향수들과 딥티크, 프레데릭 말 등 니치 향수들이 이미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어요.
르 라보의 두 창립자 에두아르 로셰(Édouard Roschi)와 파비앙 말가랭(Fabrice Penot)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조향사 동료로 만났어요. 그 둘은 대형 럭셔리 하우스에서 일하면서 상업주의에 큰 회의감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들은 마케팅 속에서 향수의 진짜 향기가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회사를 나와 향수 본연의 가치를 상업적인 논리에서 해방시키고자 했습니다.
향수가 상품이 되면, 향이 사라진다.
그렇게 르 라보가 탄생합니다. 르 라보의 연구실 컨셉은 스스로를 향수를 실험하고 조합하는 장인정신의 공간으로 정의합니다. 상탈 33, 어나더 13 등 제품명 뒤에 붙는 숫자는 이 향수를 만드는 데 들어간 원재료의 숫자라고 해요. 연구실 속 약품의 코드명 같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르 라보의 또 재밌는 점은, 고객이 매장에서 향수를 주문하면 직원이 즉시 향수를 제조하고 포장하는 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인데요. 게다가 퍼스널 라벨링까지 가능해 이름과 제조날짜, 메시지도 새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향수는 1주에서 2주 정도의 숙성시간을 기다려야만 본연의 향으로 사용할 수 있어요.
르 라보는 향수를 단순히 '사는 것'이 아니라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으로 만들었습니다. 조향하고, 라벨에 이름을 새기고, 날짜를 기록하고, 미완성의 것이 완성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기다리며 '내 것'이라는 감각을 각인시킵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 하는 향수가 아닌, '나'를 위해 만들어지는 공예적인 향수를 받게되는 거죠.
르 라보는 후발주자로 포화된 향수 시장에 등장했지만, 그만의 확고한 철학과 아이덴티티 덕분에 꾸준히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국내 향수 브랜드 평판 지수에서도 꾸준히 10위권 내를 자리하며 그것을 증명하고 있어요.
오늘 소개해드린 세 개 브랜드 모두 유서 깊은 전통 강자들 사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어요. TWG는 아주 전략적으로 설계되었고, 카발란은 대중들을 열광케 하는 역전서사, 르 라보는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정서적 프리미엄을 내세웠습니다. 후발주자로 성공하는 공식 같은 건 없어보이죠. 하지만 이 브랜드들, 공통점이 있더라구요. 브랜드에 연상되는 이미지 혹은 키워드가 굉장히 빠르게 떠오릅니다.
TWG - 럭셔리! 명품차!
카발란 - 대만 위스키!
르 라보 - 버석한 종이 라벨! 실험실!
공식은 없다지만 적어도 쉽고 직관적으로 인지되는 브랜드 이미지는 필수적인 것 같아요. 아무개 브랜드를 보고 5초 이내에 떠오르는 단어 아무거나 말해보시오! 했을 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브랜드를 다시 정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끝으로 오늘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은..
늦게 일어났다고 너무 낙담하지 말자.
입니다. 왜냐? 이 글에서 우리는 세 가지 희망을 보았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몇 가지 질문을 드리며 마무리하겠습니다.
- 신흥강자로 생각나는 브랜드가 있나요?
- 그 브랜드들에 직관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 혹은 단어는 무엇인가요?
- 여러분이 좋아하는 브랜드는 어떤 키워드가 단숨에 떠오르나요?
5월의 첫 쉑 댓 브디브디를 시간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음주에 쟈님의 글로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