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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우물 May 07. 2020

에이와 나무 명상과 다섯 가지 에피소드

20200506


ep1. 에이와 나무 명상>

수련 들어가기 전 요가매트 정리대 앞 소파에 앉아 나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들어가곤 한다  

나무를 보기보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를 더 많이 듣고

나뭇잎 소리보다는 내 안에서 영화처럼 지나가는 일련의 이미지 바라본다  

주로 현재와 먼 미래까지 계획들이 주를 이루는데,

우스갯소리로 '하도 계획을 많이 세우니까 그중에 꼭 몇 가지는 이뤄져서 영 효과가 없는 건 아니다'라 이야기도 한다  

그렇게 빠져있다가도 드문드문 명상센터 회원님이나 선생님들이 오시거나 고양이가 지나가면 인사도 하고,

N타워에 불이 들어오는 것도 보면서 수선했던 내면이 정리되는 것을 느끼고, 충만하고 흡족한 기분이 될 때 문을 열고 들어간다



ep.2 화장실의 갈림길>

어제는 에이와 나무 앞에서 한 30분 앉아있다가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문득 왼쪽 칸을 쓸지 오른쪽 칸을 쓸지 잠시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다.

남녀 구분이 되어 있지 않지만 음양의 구분에 의해서 왼쪽에 자리한 경우가 많은

여자화장실을 생각하며 좌로 갈까 하다가 오른쪽을 사용했다.

그리고 화장실에 앉아서... 좌우, 음양, 여자 남자, 아름다움과 추함, 남과 북, 감성과 이성 그 모든 게 사실은 서로 다르지 않고 하나인데, 한쪽이 존재 하기에 다른 한쪽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통합적으로 바라봐야 하는데...

우리가 필연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세상의 법칙들을 익혀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학습된 분별심이 마음속에 참 많은 장애물을 만든다 라는 "익숙한 깨달음"이 화장실 칸 좌우 선택이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찾아왔다.

머리가 맑아지면 또 새로운 아이디어와 프로젝트들이 떠오르는 편이라 이것도 내려놓아야 할 계획의 일종인가? 하면서도 기분 좋게 수련을 마치고 오늘 명상하며 떠오른 것들을 차 나눔 시간에 말했다. 계획이 많은 가득한 머릿속에 대한 이야기에는 앞에 앉으신 현명한 회원님은 내려놓기를 해야겠네요 하고 한번 더 짚어주셨고,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더니 좋아하는 일이 일이 되면 또 힘들어지기도 한다는 핵심도 짚어주신다. 서로의 에너지와 지혜로 가르쳐주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수련시간과 차 나눔 시간이 참 좋다.



ep.3 문 닫기>

나무를 보며 했던 자가 명상 수련과 사트님과 했던 수련, 그리고 차 나눔 시간에서의 재밌는 대화...

풍성해진 내면을 가지고 밖을 나서려는데 아직 나오지 못한 여러 개의 꼬리들이 걸쳐있어서 문을 닫지 않았기에 다시 가서 살포시 닫고 나왔다.


협회장님은 씩 웃으시면서 '문도 닫네'라고 하셨는데 그 한 마디가 버스 탈 때까지 재미있어서 그리고 어떤 의미로 하신 말일까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며 마스크 속에서 웃고 있었다.




ep.4 버스 안에서>

이렇게 끝난 하루였다면  깨달음과 즐거움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된 하루였다. 라며

편히 여길 수 있었겠지만 버스 안에서 경악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버스 제일 끝자리 앉아 가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고운 아가씨의 오른쪽 등 위에 딱 엄지손가락 한 크기의 바퀴벌레가 붙어있었다. 밝은 색 코트 위에 있어서 보이기도 잘 보였는데,

그녀는 바퀴벌레의 존재는 전혀 모르고 앞만 보고 있었다.

순간 너무 놀랐지만 외마디 비명도 못 지르고 얼어있었다. 그러다가 이성을 찾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 그 벌레가 그녀의 어깨를 타고 팔로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덩치도 무지막지한 녀석이라...

날개도 충분히 있음 직하고, 이 도시에서 살아남아 저렇게 큰 몸집을 키웠으니 지능이 있을 수 있다. 의자를 타고 건너갈 수도 있다. 등의 갖가지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그리하여 "원효대사 해골물"처럼 오히려 그녀가 모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고,


내가 "오른쪽 등 뒤에 뭐가 있어요"


라고 말하면 그녀도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나거나 손으로 칠 수도 있고, 그러면 깨끗한 코트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자국이 남을 수 있고, 버스 안은 한바탕 대소동이 일어날 수도 있겠군...이라는 등 염려됐다. 혹은 나를 귀신 보는 사람으로 오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짧은 순간이 많은 경우의 수가 스쳤다.

차분히 일어나서 버스 문 앞에 섰다.

아가씨가 다음 정류장에 내릴 요량으로 벨을 누르는 것을 보고 난 다시 버스 맨 앞칸까지 가서 앉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뒤돌아서 그녀를 정면에서 보니 이제 왼쪽 어깨가 된 곳을 계속 바라봤다. 너무 뚫어져라 보니, 그녀는 아마도 내 눈엔 자기 등 뒤에 뭔가 보이나 보다 하고 약간 겁을 먹은 듯 움찔하긴 했는데, 난 입술만 달싹이며, 진심 걱정되는 눈빛으로 그녀와 그녀 등 뒤를 번갈아 보았다.


그 와중에 그녀는 자세가 무척 바른 편이었는데, 고개를 함부로 돌리거나 일어난다고 수선을 떠는 일도 없이 수석 발레리나처럼 꼿꼿이 고개를 들고 서서 문 앞에 바르게 서있다가, 그림처럼 차분하게 내려갔다.

창밖으로 그녀의 등 뒤를 살폈는데 그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휴... 천만다행이다.


그녀와 바퀴벌레 둘 다 살았으니까.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데, 이태원에서부터 계속 간직하고 있던 미소는 말끔히 사라진 뒤였다.

또한 리탐빌의 '내려놓기' 화장실에서 많은 것을 새롭게 깨닫고 또 이해했다 느꼈는데, 눈앞에 보이는 야생의 현실 속에서는 그 깨달음을 유지하며 평온하기 쉽지 않다는 것, 야성을 가지고 매 순간 깨어있으면서,

제대로 보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ep.5 벌레에 대한 고찰>

<바퀴벌레= 더럽고, 혐오스럽고, 무서운 것>이라는 공식이 내 안에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알았고,

그 마음은 인간 자신이 해충이라고 부르는 벌레들에게 가지는 부당한 마음이라 여겼는데, 아직 내 안에

여전하다는 것도 알았다. 바퀴벌레도 내가 무서울 텐데, 자기도 살려고 그런 것인데, 어쩌다 낯선 버스를 타게 되었고, 몸을 숨길 수도 없는 하얀 인간의 옷 뒤에 붙어서 얼마나 떨었을까. 인간이 지배하는 지구 그리고

대도시에서 자주 쫓기고 멸시당하는 그 존재에 잠시 위로를 보냈다.


낸시랭은 고양이 인형을 등에 올리고 다녔는데, 이를테면 버스 안에서 본 그녀도 낸시랭 못지않은 행위예술가 꿈나무이며, 그날 몹시 심심하여 사람들의 반응을 보기 위해 등에 바퀴벌레 모형을 붙이고 다녀본 실험적인 아가씨일 수도 있다. 더듬이가 움직이는 걸 보진 못한 것 같고, 윤기가 많이 나지 않는 바퀴벌레였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등의 가설과 우리는 인간의 깊이와 끝 간 데 없는 그 장난기를 결코 알 수 없는 거야... 라며 나를 위로하는 상상을 하니 조금 편안해졌다.


그리고 얼마 전 집 문 앞에 음식물쓰레기봉투가 있던 자리에서 만난 까만 벌레 한 마리도 떠올랐다.

사실 벌레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편인데, 몇 년 전부터 벌레를 만나면... 작은 벌레도 생명이고 자연의 일부이니... 웬만하면 죽이지 않고 자연에 돌려보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새끼손가락 만한 제법 큰 벌레, 바퀴벌레의 형태와는 조금 다르지만 사촌 정도 돼 보이는 그 벌레를 복도 끝까지 발소리로 유인해서 돌려보냈다. 내가 집 앞에 그 쓰레기를 놓아둔 탓이다 미안하다, 먹을 것도 없었을 텐데 미안하다. 이런 종류의 벌레란 썩는 냄새에 꼬이기 마련인데, 음식물이 날씨가 풀린 요즘 같은 상온에서 썩는 것은 자연적인 일이고, 그 냄새에 끌리는 그 벌레도 아무 탓이 없으니, 결코 죽이지 말아야지.. 하면서 저만의 생명에 대한 신념?을 따랐다.


이제 버스에서의 그 바퀴벌레도 없고(등 뒤를 한번 체크해보았다) 문 앞에 있던 그 벌레도 없고, 벌레 모형을 붙이고 다니는 아름다운 아가씨라는 다소 NLP적인 급속 자가 의식화 과정도ㅎ 거쳤고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기에 벌레에 대한 생각을 모두 떨치고 편안히 집에 도착해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닫고 잠그고, 신발을 천천히 벗고... 모든 것들로부터 놓여 쉴 수 있었다.


늘 매일매일 사는 오늘 하루가 평생의 압축이라 여기며 사는 편인데...

그렇기 때문에 문을 닫고 지나온 시간과 마음과 생각을 닫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길 때 그 사이...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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