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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우물 Jun 21. 2020

이미지들

회색기둥. 풍경. 선착장.

나의 육신과 다른 몸인데도 낯설지 않고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한 존재. 사소한 섭섭함이 생길 순 있을 지라도 화내거나 다툴 일은 그다지 없을 것 같은. 아직까지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없는 존재.

인간의 깊이는 알 수 없고, 우리가 서로 어떤 스펙트럼을 앞으로 보일 지 알 순 없지만 현재로써 나는 그와 아주 즐겁고 웃음이 많은 순간들을 함께 나누고 있다. 사소한 일도 당연한 일이지 않으며 늘 감사하다.


그와 함께 주말을 보내면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잠과 깨어있는 의식의 중간... 이른바 선잠에 들기 직전의 상태 속에서. 그와 함께 있을 때. 의미를 해석하기 힘들지만 의미보다 더 강한 명징하고 선명한 이미지들을 보았다.


1. 새개의 회색 기둥이 있는 그림이다. 세계의 기둥 같기도 한 그것은 한 존재의 흐름 속에 서있는 자세로 더이상 사라지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고 무성하도록... 장승처럼.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다. 모양은 흡사 플라라니아를 닮았지만 눈은 없고 잘려있지도 않다. 바탕색은 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한 연어색이다. 얼마전 명상을 하다가 본 빛과 같다. 그 회색 기둥의 그림 이미지는 점점 변하더니 각진 형태의 광석이 되기도 했다. 푸르고 검은 빛이 도는 미네랄이었다.


나는 방금 그림을 보았어... 라고 정도로 밖에 발화하지 못했지만 그 이미지가 내 안에서 나왔다기 보다는 그가 아는 이미지의 데이터가 내게 넘어온 게 아닐까 싶은 몽환적인 확신이 들었다. 혹은 내 무의식이 그려낸 환상이거나.


2. 어느 도시의 풍경이 담긴 사진이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떠오른 심상인데 무척 디테일한 이미지라서 놀랐다. 세피아톤의 그 사진은 차분한 구도로 지평선이 수평을 이루게 조정되어 찍혔고. 사람이 없는 어느 삼거리의 풍경이었다. 배경에는 팬케이크를 각지게 쌓은 듯한 모양의 건물이 있고 그 주변에도 실용적인 형태의 낮은 빌딩들이 배치되어있다.


이번에도- 어떤 사진을 방금 봤어. 내가 가본 적은 없는 도시인데 탑같은 게 있어. 라는 몇개의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 밖에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말을 하려고 할 수록 그 이미지가 사라지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게 그 정도였고 그것을 좀더 오래 보며 탐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3. 바다와 선착장의 일부를 찍은 듯한 사진이다. 고기 잡는 배 라기 보다는 요트들로 보였는데 배의 전체적인 모습이 나와있진 않았지만, 요트마다 쓰여진 이름중에 rosewood 라는 단어를 보았다. 이 이미지들에서 놀라웠던 것은 하늘과 바다의 색깔이 바로 눈 앞에 있듯 천연색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2.3번의 경우는 마치 아이패드를 넘길 때처럼 의식 속에서 손가락을 젖히는 시늉을 하면 그와 유사한 이미지들이 연작으로 계속 보였다. 필름 인화기 앞에 앉아 기계를 조작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될지도 모르겠다.


그와 보이차를 마시고 나와 식사를 하러 갔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빈 의자를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자가 마치 그 인 것 처럼. 그가 잠시 투명해져서 의자가 보이는 것 처럼.

그 의자와 그에 대한 의식이 머물러 있는 동안 느낀 것은 그와 함께 마주보는 시간과 잠시 사라져있는 시간들을 접으면 결국 그의 존재는 항상 눈 앞에 있는 것임과 동시에 0에 수렴된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온전히 느끼는 깊은 한 순간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면 몸과 마음이 모두 멀어져 있다 하여도 순간에 영속적으로 존재함으로써 영원하기에 쉬 그리워하며 슬플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 했다.

결국 물리적 실체가 다는 아니므로 내가 보고 입고 만지고 만나는 모든 실체가 있는 것들이 다 과거와 현재의 마음들로 인해 시작되고 생성되는 것이라는 것.

무엇이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의 구분에 맘이 머물거나 물적 사고에 너무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삶 속에서 다시 확인하는 찰나였다.


홀로 집에 돌아 오는 길을 걸을 때 저녁의 공기 속. 모든 곳에 내 의식 속에 함께 하는 신과 함께 그가 있음을 느낀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묘비명 위에 정성들여 딴 들꽃을 놓던 일을 생각한다  


경계에 부딪히지 않으며 물결 무늬 처럼 겹치면서도 함께 흐르는 한 존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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