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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우물 Jun 18. 2020

흥정계곡/우중 캠핑/정선/치유의 숲


평창에서 캠핑을 했다. 흥정산에서의 우중 캠핑은 운치가 있었다. 식사 후 가지고 온 보이차를 마셨다. 야외에서 마시는 차의 맛은 참 달다. 텐트 안에서 배를 깔고 누워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읽었다. 수첩을 꺼내 떠오르는 것들을 끄적이곤 누군가와의 연결성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나 멀어져있는데 얼마나 더 가까워져있는지. 계곡 물소리와 벌레 우는 소리, 모기향 타는 냄새 속에 나른하게 몸을 담그고, 깊은 평온함을 느끼며 잠들 수 있었다.

평소 같이... 새벽 다섯 시 반. 눈을 떴다. 밤새도록 맑은 숲의 공기를 마셔서 그런지 평소보다 몸이 가벼웠다.

계곡으로 내려와 동심원을 만들면서 번지는 수면을 하염없이 보며 켄 윌버의 '무경계'를 생각했다.

서로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며 각자의 무늬를 겹쳐 흐르고 번지는 빗방울.

교차한 긴 손가락들의 춤처럼 황홀하고 아름다운 모양이었다.

낙하하는 빗방울 하나하나의 에너지와 수면을 밀어내는 물결의 에너지는 같다. 그것이 내 발에 닿아 간지럽히는 에너지와 그 촉감으로 인해 떠올리는 한 사람의 향기가 내 안으로 퍼지는 에너지는 같다. 존재하는 것들이 다 에너지라는 의미에서 같다.

텐트를 접을 때는 아쉽고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텐트를 칠 때 들인 공이 아까워서는 아니었다.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일을 늘 좋아하고 도전하기를 즐기는 편이라 처음 쳐본 거대한 4인용 텐트였지만 할만한 일이었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재밌었다. 어릴 때 이 계곡 저 계곡으로 캠핑 갔던 생각이 문득 났다.  0.1mm도 안 되는 이 텐트의 두께가 밤새 비를 피하게 해 주고, 벌레, 나뭇가지와 바람에서 지켜줬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고 놀라웠다.

그냥... 우리 삶이 아주 잠깐 내 몸이라는 신체적 경계를 만들어 외부세계로부터 나를 지키고 내 몸으로 오는 모든 즐거움과 고통들을 한껏 느끼고, 내가 사랑하는 공간을 서성이다가 다시 몸을 떠나 자유로이 세계 속으로 흩어지고 사라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이 모든 일들도 그저 텐트가 펴졌다가 접히는 것처럼 탄생과 소멸의 소란은 있을 지라도 결국 '잠깐의 찰나'라는 것을 다시 생각했다.

참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 몸만이 나 자신인 줄 알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음악을 듣다가 음악 그 자체가 되거나 비를 가만 바라보며 빗줄기를 만지며 놀다가 비 자체가 되는 등 안과 밖이 동시에 존재하는 물아의 상태가 되는 일은 삶에서 숱하게 있다. 심지어 매일 밤 꿈으로 떠나서 우리는 얼굴도 없이 그토록 바라던 풍경이 되기도 하고 그 수많은 모험을 하다 돌아오니까.

텐트 뼈대를 접고 천을 접어서 차에 모든 짐을 싣고 아주 작은 쓰레기까지 다 주운 후 산을 떠났다.   


정선에 거의 8개월 만에 다시 갔다. 출장으로 자주 갈 때는 KTX를 타고 일주일에 3번 가기도 했던 정선.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아리따운 캡틴 연화 씨와 인사를 했다. 아침에 관람 예약자에 내 이름이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그 사이 많이 야위고 머리가 길어진 연화 씨는 여전히 단아하고 고왔다.


실무를 담당하는 직원의 입장이 아닌 그저 쉬러 온 관람객의 입장으로 처음 산을 올랐다. 새로 채용되신 한 직원분과 인사를 한 뒤, 발견의 문으로 다가서는데 문득 눈물이 차올랐다. 처음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벅찬 마음만 가득 들었다. 그때 차가 한대 내려오면서 창문을 열었다. 매니저님이 나를 보면서 반가움과 걱정을 반반 섞은 표정을 보이셨다. 오랜만이에요 소민 씨. 다 보고 내려와서 이야기 하자며 여장부답고 쿨하게 내려가셨다. 매니저님을 생각하면 설산을 바라보며 서 있는 카스파 데이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위의 방랑자’라는 그림이 생각난다. 아찔한 높이의 홀로바위에서 홀연히 올라 그렇게 서 있는 매니저님의 뒷모습을 보며 내면의 단단함을 느꼈었다.

생명의 소리길을 지나서 백룡어폭포, 생애의 탑을 지나서 금강송 산림욕장, 철인의 길을 지나서 추모공원, 삼합수대를 지나서 베고니아 하우스. 해맞이 둘레길을 거쳐 풍욕장, 나를 넘어 나를 찾는 순례길. 그늘이 많은 숲길 위주로 여름 코스라며 정한 곳들을 걸었다.


생명의 소리길에서는 아직 날개도 못 편 아기 새가 땅에서 종종 거리는 것을 보았다. 발걸음 소리에 놀라서 작은 풀잎 밑에 고개를 파묻고 숨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한 건지 너무나 가엾고 귀여워서 만질 수도 없었다. 어딘가에 어미새가 있길 바라며, 발을 옮기는데 예전에 직원들과 함께 걸으면서 사진을 찍었던 곳, 홈페이지 나 홍보물에 자주 사용하곤 했던 사진이 나온 한 스폿에 멈춰 섰다. 앞서가는 선생님을 찍어드렸다.

금강송 산림욕장에서 차임벨 소리를 듣다 눈을 감았는데, 아주 작은 울림의 여운까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소리의 파장이 몸속에서 세포 차원까지 건드리는 것 같은 감각을 여실히 느꼈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오는데, 나무들이 일제히 파도처럼 일어나면서 그 물결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멀리서 나무들을 스치고 온 바람이 얼굴과 몸에 닿을 때, 저릿하고 깊은 감흥이 있었다.  


삼합수대에 올라서 탁 트인 전경을 감상하면서 입이 안 다물어지도록 놀랐던 일은, 길을 내느라 윗 둥이 잘려서 둥근 머리가 보였던 나무들에 모두 새 가지가 났는데, 초록물이 가득 차올라서 두릅 대처럼 신선해 보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눈 앞의 강을 반 정도 가릴 정도로 나무들이 커버렸다. 자연의 치유력과 재생력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스마트팜으로 지어진 베고니아 하우스에는 거짓말처럼 정말 얼굴보다 큰 꽃들이 피어있었다. 아직은 재배실 공사가 안 끝나서 정비와 조성이 더 필요해 보였지만, 모종으로 겨우 한국에 들어온 아이들이... 회장실에 에어컨을 켜서 밤새 보관하기도 하던 그 모종들이 그만큼 크고 화려한 꽃들을 피워낸 걸 직접 눈으로 보니 감격스러웠다.

다시 돌아와서 보니, 많은 것들. 미움, 집착, 원망, 고통들을 다 놓아버리고, 홀가분해진 마음이었다.

순례길을 내려가면서 홀로 바위에 갔을 때, 내 안에 뭔가 변해있는 것을 느꼈고,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던 그 바위에 스스럼없이 올라가 앉았다. 홍보영상 가을 편을 찍을 때, 차분한 인상의 외국 모델이 편안히 바위 위에 올라앉던 일이 생각났다.


풍욕장에 있는 황금개구리의 오른쪽 눈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한쪽 눈이 개안되었으니 곧 두 눈 다 떠지고 해탈이 머지않았구나...? 하고 응원해주었다. 나무들을 실컷 보았다.


카페에 다시 내려가서 매니저님과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걱정 많았고 자주 생각났다고, 전에 와서 늘 작업하던 간판들이며, 글들 보면서 예전 생각을 많이 했다고. 고생 많았다는 말에 또 한 번 눈물이 날 뻔했다. 내 수고를 알아주어서 설움이 풀려 나는 눈물이라기보다는 후회 없이 열심히 일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 이곳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게 감사하고 기쁜 마음에서였다. 어딘가에 가치를 만들어 주는 일을 하길 바라고, 가치롭게 일하길 바랐던 소원이 하나가 또 이뤄진 것.


참 좋은 여행이고 치유가 되는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나무 같아지고 싶다고 말했다. 소민 씨 단단해져야 돼요. 하지만 유연해지기도 해야 돼요.라고 말하는 매니저님. 단단하고 유연하게 나무처럼.

그러더니 어색한 분위기 만들지 않으려고 얼굴만 더 작아졌다면서 ㅎ 다이어트 강요의 눈빛을 보내는 ㅎ 매니저님과 캡틴 때문에 끝까지 많이 웃었다.

모든 땀과 애태움 끝에 미소와 웃음 만한 치유가 없다는 결론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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