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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점 우물 Jun 12. 2020

무의식

치마 광대버섯

어제는 아침에 별 것도 아닌 일로 우울감에 빠질 뻔했다. 새벽 5시 반에 눈을 떴고, 책을 조금 정리하고,

여유롭게 샤워를 하고 시간을 봤더니 아직 30분 이상 남았다. 화장도 하고 사둔 뒤 잘 안 입던 짧은 꽃무늬 원피스도 꺼내 입었다. 짧아진 치마 길이만큼의 여자가 거울 속에 서 떠올랐고 여자의 표정이 낯설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시간은 남았다. 토민이에게 간식도 주고, 집을 돌아보며 정리했는데... 평소보다 늦어버렸다. 밖으로 나와 집 앞의 사거리에서부터...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사람들이 다리를 보는 것을 느꼈다. 예민해서가 아니었다. 신경이 많이 쓰였다. 중학생 여름날 짧은 반바지를 입고 나갔을 때 다리로 쏠리던 시선들에 느꼈던 당혹감이 몰려왔다. 바쁜 아침 시간인데 길을 걷다가 멈추기도 했다. 정신이 없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지하철 역에 와서는 마스크랑 손수건도 안 챙긴 걸 알아챘다. 시간을 잘 맞추는 일이 늘 어려워서... 이런 때는 괜히 의기소침해진다. 자책하려 하던 순간 전화가 왔다. 지금 늦었다, 마스크도 안 가져왔다고 했는데... 괜찮다, 별일 아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이 순간 큰 위안이 되었다. 목까지 울음이 차오르는데,

다시 삼키고 꿋꿋하게 걸었다. 누가 보든지 말든지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다리와 짧은 치마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건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라고 속으로 말하고 나니 편안해졌다. 어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던 걸 등 뒤에서 목덜미를 낚아채서 도와준 것 같은 아찔한 느낌이 남았다.


짧은 치마를 다시 입을 수 있을까?


치마에서부터 생각을 벗어나고 싶었다. 어떤 기억들이 때론 뒤틀려서 돌아올 때, 모든 하던 일을 멈추고 그만하고 싶고, 가만히 눈을 감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똑바로 세상을 쳐다볼 용기가 없을 때의 일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현재 안에 모든 시간이 들어있다고... 느끼며 살고 있다. 실제로 하루 속에는 무수한 날들이 늘 공존한다. (이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걸 어느 날 나 스스로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는 계기를 찾길 바란다.) 그것은 명상을 하는 중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일상 속에서 수시로 명상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온전히 현존하며 사는 삶 속에서 명상하며 존재하며 더 깊어질 수 있기를.)


점심때 최인아 책방에 가서 책을 둘러보다가, 스벤야 아이젠 브라운이 쓴 심리학 사전을 폈다.

최근 내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는 환각 버섯들이 그려진 페이지가 펼쳐졌다.!?


그 책의 표지에는 아래와 같은 말이 적혀있다.

"내가 빨간 운동화를 사면 그때부터 매일 빨간색과 마주치게 된다. 왜 다들 갑자기 빨간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걸까?... 우리가 무의식으로부터 받는 영향은 얼마나 클까?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무의식은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다고,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나를 조종하는 무의식을 낱낱이 파헤쳐보자"


버섯을 따서 바구니에 담으며 산책하는 것을 상상한다. 나는 그곳에서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마른 바위 위에 앉아서 나뭇가지 사이에 숨은 새소리와 수풀이 짐승의 털에 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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