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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최후의 만찬

인생의 꾸준함.

by 윤 Yoonher

토스카나에서 산지미냐노, 시에나, 오르비에토, 치비타 디 반뇨레조, 피엔자, 몬테풀치아노를 지나 다시 헤어지는 날이 돌아왔다. 렌트카 반납은 피렌체 오후 1시였다. 자매는 베네치아로 갔다가 파리를 거쳐 스페인 여행을 할 예정이었고 B와 나는 밀라노 일정이 비슷해서 우선 함께 밀라노로 이동 예정이었다. “마지막인데 점심은 먹고 헤어지자. 볼로냐 어때?!”볼로냐는 피렌체에서 한 시간 운전해서 올라 갸아 한다. 베네치아나 밀라노 모두 볼로냐를 지나가야 하기 때문에 렌트카 반납을 볼로냐에 하고 기차를 타고 각자 도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볼로냐는 맛의 도시다. 1년 동안 세계여행을 한 남동생이 “볼로냐 라자냐랑 라구 파스타 진짜 맛있어 누나. 진-짜.”를 연발하던 말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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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볼로냐 어디 가야해? 딱 한 끼 먹을 거야.”적당한 곳을 추천해줬다.

아쉬운 마음으로 아그리투리스모 자매와 남자친구와 진한 인사를 하고 네비를 찍었다. “윽 1시 30분 도착이래. 얼른 가자!“ 베테랑 드라이버 B가 운전대를 잡았다. 신나는 음악도 틀었다가 이탈리아 깐조네도 틀고 다들 말없이 창밖을 보며 음악을 듣는다. 아름다운 토스카나가 점점 등 뒤로 멀어진다. 이상하게도 아쉽지 않다. 충분히 행복한 시간들을 간직하고 떠나므로. 측정 불가능한 기쁨과 성장이 분명 우리를 감싸는 듯 했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마지막 날 밤 어둠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보름달의 따스함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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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있는 힘껏 밟았지만 2시 15분이 돼서야 볼로냐에 도착했다. 미리 렌트카에 전화를 해서 추가요금을 안 내도록 부탁을 해놨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2시 넘으면 절대 안 돼!”라고 했었다.

렌트카 여행이 처음이라 잔뜩 겁을 먹었는데 다행히 추가요금을 지불하지는 않았다. 우리에게는 더 걱정되는 일이 있었다. 식당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볼로냐에 순전히 먹으러 온 건데 식당이 문을 닫는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남동생이 알려준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었다. 여직원이 받았다. “안녕. 미안해. 지금 기차역 앞인데 택시타고 레스토랑에 도착하면 2시 40분 정도 될 것 같아. 가도 될까?”싫어하는 눈치였다. 옆에서 어떤 아저씨가 전화를 바꿔 받았다. 주인아저씨 같았다. 짧은 이탈리어로 다시 얘기했다.

갑자기 이탈리어가 유창하게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네 명인데 너희 레스토랑에 가려고 지금 볼로냐에 도착했어.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 가면 안 될까? 10분이면 도착해!”

아저씨가 말했다. “We are waiting fo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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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 캐리어 4개를 구겨 넣고 레스토랑을 향해 달려갔다. 택시에서 내려 짐 가방 네 개를 밀며 레스토랑으로 향하니 너희일줄 알았다는 듯 테라스 길가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주인아저씨는 동네 반상회를 주최한 듯 열 명 남짓 멋쟁이 이탈리아 신사들과 와인 잔을 기울이며 토론을 한창하고 있었다. 목소리 톤을 들어보니 정치이야기 같았다. 나중에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흥분하는 모양새가 정말 그랬다. 서빙 하는 여자직원들은 쉬지 못하니까 입이 나왔다. 뭐 우리는 약간의 불친절에 기분나빠할 입장이 아니었다. 볼로냐에서 최후의 만찬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행복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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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도 없이 떠오르는 대로 주문했다. 라구 탈리아텔레 (납작한 파스타 면의 소고기 갈은 토마토소스 파스타로 볼로냐 대표적인 음식), 가지 라자냐, 리코타 치즈를 넣은 라비올리, 신선한 샐러드, 피오렌티나 스테이크, 아! 와인도 시켜야지. 토스카나를 아직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몬테풀치아노 레드와인 한 병을 주문했다. 레스토랑에는 우리와 바로 옆 테이블의 부부, 주인아저씨를 주축으로 한 동네 반상회 테이블이 전부였다. 곧 옆 테이블의 부부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고 음식이 하나 둘 나왔다. 손이 바쁘게 움직인다. 입에 음식 한입 그리고 와인 한 모금. 아 인생은 이렇게 풍요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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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아저씨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가고 아저씨는 자연스레 남은 와인을 들고 우리 자리로 왔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동양여자에 대한 과잉친절이 있다고들 하는데 예전 밀라노에서 공부 할 때도 내게 과한 친절을 베푸는 남자들은 없었다. 어쨌든 아저씨는 우리에게 장미를 한 송이씩 건넸다. 그 뻔한 장미 한 송이에 여자 넷은 “어머“하면서 입이 귀에 걸렸다. 나중에 남동생에게 들어보니 그 레스토랑은 모든 고객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넨다고 했다. 하하. 아저씨와 우리는 금방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세계여행 한 남동생이 유일하게 추천한 레스토랑이라 이곳에 왔다는 약간의 과장 섞인 나의 말에 아저씨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했다. 곧 주인아저씨 와이프가 자전거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왔다. 아저씨는 수표를 써 주고 소박한 옷차림의 와이프 아줌마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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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저씨에게 지나가던 흑인이 담배를 하나 달라고 했다. 아저씨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흑인도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 달라고 보채는 통에 그까짓 담배 하나 줘버리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저씨는 좀전 정치토론을 할 때처럼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치며 말했다.

“물 한모금은 줄 수 있어도 일하지 않고 공짜로 얻는 건 절대 안 돼!” 방금 전까지 생글생글 웃던 아저씨는 결연해보이기까지 했다. 흑인도 놀래서 돌아갔다. 아저씨는 41년째 음식점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본인은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 동안 일을 해오고 있는데 어떻게 노동을 하지 않고 댓가를 바라냐며 열변을 토했다. 볼로냐 아저씨의 일에 대한 철학은 약속이었다. 자신과의 약속. 꾸준함. 성실함. 삶의 굳건한 터전이었고 삶 자체였을 것이다. 지금 볼로냐의 이 아름다운 레스토랑을 24년째 운영하며 이면에 숨겨진 아저씨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한 길을 꾸준히 걸어온 사람만의 성실한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럴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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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우리가 가야 한다는 말에 주문했던 몬테풀치아노 레드와인 두 병을 선물로 꺼내 주었다. 음식점 사장으로서의 서비스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나누었던 대화는 추억이었으니까. 볼로냐에서의 최후의 만찬. 음식은 물론이고 일의 가치, 이탈리아 사람들과의 추억을 더해준 멋진 만찬이었다. 챠오! 볼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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