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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다시 살기

by 윤 Yoonher

볼로냐에서 밀라노로. 다시 북적이는 중앙역에 도착했다. 여행의 반이 지났다. 한국의 아들과 남편과 연락을 할 때 마다 남편은 여기는 잊고 여행에 집중하라는 말을 해줬다. 아들은 내가 여행 떠나기 전 서글피 울던 것과는 정 반대로 엄마 없는 틈을 타 난생처음 오락의 맛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한 마디로 내가 없어도 집은 잘 돌아갔고 - 어쩌면 더 평화로운 시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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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 엄마가 혹은 결혼한 여자가 추석연휴에 혼자 여행을 간다고?” 남의 집 사정에 적지 않게 놀라며‘책임’따위를 운운하지 않아도 되는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책임과 자유. 아마도 책임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책임을 물리적 족쇄정도로 생각하는 것 아닐까. 사랑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다한다는 건 어쩌면 상상하는 것처럼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진 것과는 또 다른 의미일지도 모른다. 의외로 책임은 즐겁고 행복한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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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에는 아파트를 빌렸다. 길지 않은 4일 동안의 시간이라도 깊숙이 생활자로서 지낸다면 그걸로 충분한 여행이었다. 머나먼 추억을 더듬고 의미를 곱씹고 시간을 맴돌면서 지금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고 싶었으니까. 이솔라 지역은 최근 밀라노 엑스포와 함께 뜨고 있는 지역이다. 아기자기한 바와 레스토랑이 골목마다 위치해 있는데 그 모양이 번잡하지 않아서 주거지역으로도 손색없는 곳이다.

아파트 주인은 에어 비앤비 사이트에 본인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글을 쓰고 요가를 가르치고 가능한 많이 여행을 한다. 나는 예술과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항상 먼 곳으로 날아갈 계획을 세운다.”다른 아파트가 맘에 더 들었지만 적당하게 깔끔하고 소박해 보이는 그녀의 아파를 고른 이유는 소개 글 때문이었다. 자기소개는 직장을 구할 때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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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주인 지베르나에게서 요가수업이 끝나면 밤 8시가 넘으니 혹시라도 일찍 오면 집 근처에서 아페르티보(이탈리아식 해피아워)를 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베르나가 소개해준 바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도 여럿 보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퇴근 후 저녁을 먹기 전 바에서 칵테일 한잔과 간단한 음식을 먹는다. 보통 7-10 유로에 칵테일 한잔을 먹으면 간단한 파스타나 샐러드 스낵 등을 마음껏 가져다 먹는다. 학교 다닐 때 아페르티보에 반했던 이유는 저녁 대용으로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학생에게 술한잔과 분위기도 좋고 이것저것 즐기며 먹을 수 있는 아페르티보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커다란 캐리어가 부담스러워 바에 들어가려는 생각은 그만두고 캐리어를 길가 벽에 기대고 그 위에 앉아 사람들 구경을 하고 있었다. 곧 장미꽃을 파는 사람이 다가왔다. 볼로냐 식당 아저씨가 준 장미꽃을 버린 걸 후회했다. 캐리어에서 내려와 끌고 자리를 살짝 옮겼다. 미안할 정도로 끈질기다. 시간을 버는 동안 지베르나에게 연락이 왔다.

예상했던 것처럼 밝은 미소를 띤, 한눈에 봐도 이탈리아 여자인 지베르나가 자전거를 타고 왔다.

“안녕. 많이 기다렸지. 오 미안! 반가워.”그녀의 말에 고향에 온 듯 편안한 뭉클함이 느껴졌다.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 자전거를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아파트로 올라갔다. 금빛 열쇠를 구멍에 넣고 두 번 오른쪽으로 돌린 후 짙은 청록색 나무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는 작은 싱크대가 놓여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식탁과 2인용 소파가 있었다. 한 쪽 벽면에는 여러 개의 선반으로 만들어진 책장이 있었는데 예술과 영화를 좋아한다는 그녀답게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여러모로 귀여운 느낌이 드는 집이었다. 왼쪽으로는 심플한 침대와 옷장, 화장실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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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보석 같은 공간이었다. 베란다 문을 살며시 열면 아주 자그마한 발코니가 있었는데 그녀가 나둔 나무의자에 앉으면 뻥 뚫린 파란 하늘을 매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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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그녀의 꼼꼼한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쓰레기 버리는 법, 와이파이 비밀번호, 가까운 타바끼 (담배, 커피, 음료수, 버스티켓 등을 파는 가게)는 어디 있는지 등등. 혹시 내가 배 고플까봐 간단한 빵을 사다 놓은 배려심에 감탄하면서 “근데 정말 집이 너무 예쁘다.”라고 말에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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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나는 “아. 고마워 이 집은 내가 10년 동안 살던 집이야. 이 집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어.”싱글인줄 알았다고 하자 아이가 둘이나 있다고 했다. “와 나도.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녀.” “오 마이갓. 말도 안돼. 너가? 20대로 보여!” 외국사람들은 동양 사람을 무조건 어리게 본다는 것에 대해서 익히 잘 알고 있다. 그런데 “ 푸하하” 난 이미 입이 찢어져서 귀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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