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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보석찾기.

블루노트

by 윤 Yoonher

시간은 잘도 흘러 어느새 여행 막바지가 되었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은 찾아낸다면야 끝도 없겠지만 적당히 시간을 음미하며 감정에 충실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지나치는 모든 것을 눈에 담고 담은만큼 카메라에 담았다. 여전히 밀라노는 회색이었지만 점점 온화함으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예기치 않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고 얼굴에 숨겨진 웃음과 표정이 살아났다. 내가 있을 곳이 어딘지를 알게 되었고 인생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사랑의 에너지가 파란 하늘에서 햇빛이 되어 날 비추는 듯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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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밤은 공연을 보고 싶었다. 라스칼라에서 오페라를 볼까 했지만 마음에 드는 공연은 날짜가 안 맞아서 포기했다. 아파트에서 걸어서 7분 거리에 세계적인 재즈클럽, 블루노트가 있었다. 재즈를 좋아하지만 잘 모른다. 가끔 즐기는데 어색하지 않을 정도일 뿐. 블루노트는 뉴욕. 하와이. 도쿄. 밀라노에 있다. 근데 이 조합이 참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뉴욕. 하와이. 도쿄야 어느 부분 연결성이 있다 치더라도 이 조합에 밀라노라니. 이탈리아 사람들이 원래 이렇게 재즈를 좋아했었나.


어쨌든 밤 11시 30분 공연을 위해 10시 30분 블루노트로 갔다. 문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오늘의 공연은 일본 재즈피아니스트 히로미와 남미출신 하피스트의 콜라보레이션 공연이다. 사실 처음 들어보는 연주자들이다.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도 좋으니 정통재즈 그룹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공연장 앞에 일본여자들과 이탈리아 남자의 조합인 그룹이 몇몇 보였다. 그중 한 그룹의 젊은 이탈리아 남자가 눈에 띄었다. 흰 자켓을 입고 큰 눈은 똘망똘망한 느낌이었는데 시종일관 옆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했다. 그는 한 손에 큰 액자에 한자로‘힘력’한 글자가 털로 만들어진 요상한 것을 들고 너무 좋아하고 있었다. 아마 일본문화를 경이롭게 생각하는 취미를 가진 듯 했다.


공연장이 오픈되고 차근차근 사람들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도 적당한 곳에 앉아 저녁을 주문했다. 밤 11시는 밥을 먹기에 적당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오기 전 나빌리오에서 먹은 아페르티보로는 허기를 느끼던 참이었다. 재즈클럽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고 서버들은 이탈리아에서 한번 도 본적 없는 재빠름으로 체계적으로 주문과 서빙, 계산을 하였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블랙 슬리브리스 원피스에 발목까지 오는 레깅스와 검정 운동화를 신은 히로미가 나왔다. 머리는 위로 올려 묶어 한껏 부풀렸는데 그녀가 개구쟁이처럼 웃으면서 나오는 모습과 잘 어울렸다. 먼저 인사를 하면서 종이에 적어온 이탈리어를 수줍게 읽어 내려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환호했다. 정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동양 사람에 대한 신비감은 상상이상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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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미가 치는 피아노 도입부에서는 정체모를 음색이 귀를 불편하게 했다. 하프연주도 마찬가지로 리듬을 받아들이기가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강렬한 힘이 관객을 집중하게 만들고 있는 듯 했다. 갑자기 피아노를 리듬감 있게 두드리던 히로미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움직임이 급작스러워서 흠칫 놀라고 있던 찰나 그녀는 씩 웃으며 관객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미친 듯이 피아노를 두들겼다.

광기어린 몰입. 엉덩이가 들썩이고 입에선 자연스레 거친 숨소리가 나오고 손은 자유자재로 춤을 추고 있었다. 몰입하는 사람에게서는 강렬하게 반사되는 에너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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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후반 연주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두운 블루노트 재즈클럽의 두 예술가의 연주도중 순간 정지된 화면처럼 느껴졌다. 자신다운 길을 끊임없이 갈고 닦고 온전히 즐기는 몸짓의 아름다움이란.

사람도 인생도 결국 나 자신으로 살 때, 비로소 꽃이 피듯 아름다운 것 이라는 걸. 어떤 비교도 꾸밈도 질투도 변명도 설명 따위 필요 없이 그냥 자기다운 삶을 살 때. 인생의 목적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완전한 나를 알고, 피상적이 아닌 진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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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의 마지막 밤은 예술가의 열정을 선물해줬다. 그 열정이란, 특별한 예술가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한참을 블루노트 앞에서 서성였다. 이탈리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파트로 돌아가는 길, 밀라노의 차가운 밤공기는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졌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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