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전의 나를 만나러
기나긴 추석연휴가 시작되었다. 대체공휴일과 임시공휴일까지 더 해져 장장 10일의 꿈만 같은 시간이 생긴 것이다. 애초 계획은 발리였다. 남편, 아들과 함께 푹 쉬다 올 요량이었다. 휴양 식 휴가를 퍽 선호하지 않지만 발리는 가보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여행을 앞두고 신이 나지 않았다. 장장 10박의 숙박을 찾아보는데 게을러졌고 딱히 기대되지 않는 그런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문득 항공사에 전화를 했다. “이태리 비행기 티켓 자리 있나요?”워낙 성수기라 설마 티켓이 있겠어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한 전화였다. “네, 고객님 딱 한 자리 있습니다. 지금 바로 예약하시겠습니까?”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건 가야해. 와우! 그나저나 걱정되는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선 예약부터 했다. 지금이 아니면 이태리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기쁘게 부추겼다.
연초부터 밀라노 행 비행기 티켓을 두 번이나 취소했다. 이건 곧 퇴사의지를 두 번 가졌었다가 현실과 타협 중 이라는 뜻이다. 이러다 바보 되는 건 금방이지 싶었다. 회사일은 내게 아무런 성취감도 보람도 주지 못했다. 외적으로는 버리기 아까운 허울이었다. 신입사원 공채에 수천 명이 원서를 내는, 자랑스럽다고들 하는 이 대기업은 내게 오직 돈을 버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딱히 대안이 없는 상태로 우선, 내적으로 영글지 못한 자신부터 챙기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명상을 시작했다. 분노로 점철되었던 작년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써내려가지 않으면 그야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감은 스스로 회복해야 했다. 과거의 영광을 읊조리는 바보 같은 짓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남을 탓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싫었다. 그저 내 힘으로 앞으로 한 발 나아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절실히. 담담하고 완연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났다.
여전히 부족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지만, 나 자신을 내려놓는 일이란 끝없는 연습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 때 즈음 밀라노에 가기로 결심했다.
“오빠, 있잖아. 나 추석연휴에 밀라노 혼자 다녀와도 돼?”
“응 그래.”얼마 전 회사에서 한 달간 해외연수를 다녀온 덕에 남편은 발리는 안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선뜻 그러라고 하니까 괜스레 미안했다.
“아니 추석연휴에 밀라노를 안 가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데 아직 대안도 없고. 나 진짜 가고 싶어.”
“그래. 다녀와. 부모님께는 출장 간다고 말씀드릴게. 가서 푹 쉬고 생각도 많이 하고 와.”
결혼하고 혼자 이탈리아 유학을 갈 때도, 이번 여행도 남편의 외조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일이다. 어떤 판단이나 틀에 가두지 않고 묵묵히 있는 그대로 사랑을 베풀어주는 마음이 아니면 가능한 일일까. 감사하다.
언제나 딸의 행보를 응원해주시는 부모님은, 마침 발리 화산폭발 뉴스를 보시고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는 건 잘 한일이라며 안심을 시켜주셨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은 “너무해”를 반복하면서 무슨 회사가 10일이나 출장을 가냐고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의 눈을 보니 한순간에 마음이 약해졌다. 지금은 우선 나 자신을 살려내야 할 때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기적인 엄마는 떠나기로 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