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행의 목적

by 윤 Yoonher

이태리는 여러 색깔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북부는 알프스를 마주하고 있어서 스위스느낌이 난다. 남부는 낭만적이고 중부의 매력은 이태리의 심장 같다.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우던 문화와 예술만 제대로 보더라도 몇 달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알려진 대도시만 해도 가야할 곳이 넘쳐나 행복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이탈리아. 소도시의 매력을 또 빼 놓을 수 없다. 가야만 하는 이유를 대자면 정말 끝이 없다. 아마도 앞으로 사는 동안 매번 이태리로 여행을 온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일이 아닐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후 여행 컨셉을 어떻게 해야 하나 적지 않은 고민을 했다. 관광이 아닌 여행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하기에 적당한 도시와 장소를 찾고 싶었다. 타인이 “여기는 꼭 가봐야 한다.”라는 말에 하나, 둘 넣다보면 유유자적한 여행과 달리 빡빡한 일정을 짜기 일쑤다. 생각을 거듭하다가 밀라노와 토스카나 소도시를 여행하기로 했다. 다시 가고 싶은 도시, 먹고 싶은 음식, 보고 싶은 것들을 단순화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만 내 방식대로 여행하기.


여행 일정은 특별할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반적이라고 말하기에도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보통 이태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이라면 밀라노는 대부분 '볼 것 없다'고 단언하는 도시기 때문이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두오모 성당과 최후의 만찬, 쇼핑을 빼고 나면 밀라노에 대한 설명은 장황하게 길어진다. 결론은, 깊게 느낄수록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도시라는 거다. 밀라노는 생활자로서의 여행지로 과거와 현대의 조화가 특징이다. 시티 라이프, 중세, 패션, 음악. 미술. 디자인. 음식. 날씨. 근교 자연 소도시들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곳.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잠시 살았던 곳에 다시 살기 위해 떠나는 여행. 단 며칠이라도 생활하기 위해 떠난다.

P1000538.JPG

여행의 이유는 그저 떠나고 싶어서 일수도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겠다는 희망이 있다면 어떨까. 거창하지 않은 것이라도 좋다. 무엇이든 희망을 품고 떠나는 여행은 아름답다. 여행을 통해 내 안의 보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안고 여행가방을 싼다. 창고에서 가장 커다란 여행가방을 꺼내 버릇처럼 책을 몇 권 넣었다.

직장생활을 통해 최근 느껴온 좌절감이나 무의미함을 털어낼 책을 고르는 일. 결연한 의지로 책을 정성스레 고르고 여행중간마다 끄적일 노트 한 권도 챙겼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폴 서루 그리고 피천득과 몽테뉴. 몽테뉴의 ‘수상록’으로 인생의 근본을 다잡고 피천득‘수필’로 인생의 소박함을 상기하고 싶었다. 너무 심각해지지 않기 위해 하루키의 유쾌한 여행기를 넣었고, 많은 영감을 줄 것 같아 폴서루의 ‘여행자의 책’을 골랐다.

그냥 고른 책은 없었다. 식상하지만 여행은 나를 찾는 과정임에 틀림없으므로. 앞으로 삶의 실마리를 얻는데 모든 노력을 쏟고 싶었다.


토스카나 시골 소도시 마을을 다니려면 차를 빌려야했다. 자주 남자처럼 운전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터라 운전은 오히려 문제가 아니었다. 치안과 약간의 쓸쓸함이 어쩐지 맘에 걸렸다. 전체 여행일정 중 반에 해당하는 토스카나 일정은 동행을 구해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여행카페에 글을 올렸다. “30대 여자 직장인 토스카나 렌트카 동행 구합니다.”대학교 4학년, 뉴욕에서 한 달간 여자 넷이 아파트를 함께 사용했던 방법이 퍼뜩 떠올랐다. 좋은 기억은 망설임 없이 시도를 하게 한다. 몇몇에게 연락이 왔다. 서로 일정을 맞춰 ‘30대 여자 직장인’ 3명과 토스카나 여행을 함께 하게 되었다. 대강의 일정과 숙소도 정해졌다. 이제 정말 떠나는 일만 남았다.


내 주변과 작별인사를 하고 공항에 발을 들였다. 향수가 서린 공항에서 항상 만남과 이별에 대해서 생각한다. 스무 살에 헤어진 친구에 대해서.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1년에 몇 번은 이 공항에 오겠다는 상식적인 상상 뿐이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시고 주변을 둘러봤다. 스무 살의 나, 서른 살의 나, 그리고 지금 나를. 우연히 이 회사에 와서 싸이코패스를 만난 건 이태리를 가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을 찾겠다는 여행의 목적도 인생의 부딪힘이 있었기에 생긴 거니까. 불완전한 지금이 좋다. 괜찮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