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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밀라노

by 윤 Yoonher

반갑기 그지없을 것 같았지만 막상 밀라노 말펜사 공항에 도착한 첫 느낌은 낯설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귀에 익은 이태리어가 조금씩 마음을 놓이게 했을 뿐 9년 만에 온 이태리는 어쩐지 생경했다. 오직 머릿속엔, 늦은 밤 예약해놓은 호텔에 무사히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됐다. 공항버스를 간신히 타고 지친 몸을 창가에 기대니 이태리 사람들의 이런저런 불평이 들린다.“대체 버스는 언제 출발하는 거야.”

“아 오늘 날씨 너무 춥다.”등의 사소한 말들은 아 내가 밀라노에 드디어 왔구나 싶었다.


밀라노 중앙역 앞의 호텔을 간신히 찾아 체크인을 하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휴, 무사도착. 이태리에 왜 그토록 오고 싶어 했는지 갑자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절절했던 이유들은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고, 결혼 후 혼자 유학 왔던 12년 전 그해 여름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국의 그 어떤 것도.


새벽 5시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밀라노 근교도시를 여행하고 싶었다. 가보지 않았던 곳을 꼽다가 시르미오네에 가기로 했다. 밀라노에서 베로나로 가는 길목에 있는 가르다호수 한 어귀에 있는 휴양지다. 가르다호수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지만 정확히 가르다 호수 어디쯤인지 알 수 없었다. 여하튼 시르미오네에 안 가본 건 확실했다.


아침 8시쯤 기차를 탈까 싶어서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밀라노 중앙역 앞의 호텔은 대놓고 ‘우리 호텔은 지나가는 관광객을 위한 호텔입니다.‘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러니 어떤 서비스나 이탈리아 고유의 음식문화 같은 건 기대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긴 조식을 먹었다.

다른 건 그런가보다 했는데 커피까지 맛이 없자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역 앞의 일회성 관광객을 위한 호텔이라고 해도 이탈리아 자부심인 커피 맛을 포기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돈을 위해서 매력을 포기한 느낌이 이런 걸까. 이탈리아에서 맛본 첫 카푸치노 맛은 옛 추억과 기대를 무참히 깼다.

한편 여행자들이 밀라노에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학을 하면서 느낀 밀라노와 중앙역 호텔에서의 밀라노는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뭐든 기대한 사람이 잘못일지도 모른다. 이것도 이탈리아의 한 면이다. 내 사랑 이탈리아에 이 정도로 실망하기엔 이르다. 훌훌 털고 중앙역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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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완행기차는 레지오날레라고 부르는데 시르미오네에 가기 위해서는 데센자노행 레지오날레를 끊었다. 가격도 저렴하다. 중간 중간 작은 역들에 정차하느라 조금 느리게 가지만 괜찮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천천히 가는 기차여행은 사유할 수 있는 좋은 여행이다. 폴서루는 여행자의 책에서 비행기를 주제로 여행기를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치과 의자에 앉은 듯한 불편한 비행기여행에서 어떤 영감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는 여행기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기차도 여행의 일부가 되는 장소로 충분한 것이다. 레지오날레는 지정 좌석이 없다.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기차 끄트머리칸의 의자는 가로, 세로로 촘촘히 효율성을 자랑하며 벽에 붙어있었다.


반갑게도 여러 명 책을 읽고 있었다. 입석도 있던 탓에 북적임과 책을 들고 있던 모습은 조화롭게 어울려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기차에 저마다 목적을 갖고 탄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본다. 손을 꼭 잡은 연인도, 무심히 신문을 보는 아저씨도, 데이트를 앞둔 듯 예쁘게 꾸미고 책을 보는 여자도. 일상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기차를 탄 이들의 풍경. 우리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망상을 멈추고 하루키 여행기 책을 펼쳤다. 시니컬함과 겸손함이 유머가 되는 하루키의 여행기를 좋아한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2년 간 살면서 쓴 <먼북소리>는 십년 전 나의 친구였다. 마흔이 되자 귀에서 벌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하루키. 떠남은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말에 십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공감한다.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의 의미가 무슨 말인지. 그저 떠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절절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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