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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미오네에서 자전거를

혼자 여행하는 즐거움

by 윤 Yoonher

밀라노에서 데센자노역까지 1시간 20분이면 충분했다. 역에 내려 사람들이 우르르 가는 방향을 따라 버스를 두 번 타고나서야 시르미오네에 도착했다.

가을이라 한산하지 않을까 했지만 주말여행으로 온 유럽 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큼지막하게 이탈리아라고 쓰인 파란색 후드티를 입은 이탈리아 젊은 아빠와 꼬마. 독일에서 온 손을 꼭 잡은 노부부, 스위스에서 온 가족 등.

시르미오네 입구에는 중세시대 모습을 간직 한 로카 스칼리제라 성이 있다. 성 입장권을 사면서 잊었던 이태리어를 몇 마디 해봤다. 매표소의 아저씨가 “너 일본 사람이니?”(제발. 일본, 한국, 중국 다 다르다고!)

“아니, 한국 사람이야” “이탈리아어 배웠어? ” “조금. 근데 거의 까먹었어.”기억나는 이탈리아어를 총동원하여 짧은 대화를 나눴다. 입으로 내 뱉으니 기억 속의 이탈리아가 점점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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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꼭대기는 그리 높지 않았다. 좁다란 계단을 차근차근 올라가니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상상했던 이태리 하늘색깔 커플룩의 노부부가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찍어드릴까요?" 묻자 환히 웃으셨다.

시르미오네 하늘은 잔뜩 흐렸다. 가르다 호수 맞은편의 마을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 자욱한 날씨였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대서 혹시 몰라 챙겨온 머플러로 목을 칭칭 감았다.

아침 호텔의 카푸치노 맛만큼이나 당황스러웠다. 아니 이탈리아의 하늘은 언제나 새 파란색 아니었나? 그럴 리가. 유학 했던 1년 동안 흐린 하늘에 안 좋은 날씨가 분명 많았을 테다. 겨울에는 난방이 안 되는 시멘트 바닥 방이 추워 덜덜 떨던 기억, 이탈리아 사람들의 안일한 태도에 화가 났던 적도 수 없이 많다. 사랑스러운 기억만 간직했던 이유는 그 당시 꿈을 꾸던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편집된 조각이었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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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로 향했다. 호수가 바다처럼 넓다. 새들과 오리들이 연신 몰려든다. 사람들이 하나 둘 호수가로 나오니 오리들은 여간 귀찮다는 듯이 떼지어 이동한다. 먹을 거 줄 거 아니면 저리가 라고 말하는 듯이. 큰 타월을 깔고 누워 책이나 볼까 했지만 날씨 덕에 그럴 수는 없었다.


특별한 계획 없이 시르미오네 올드타운 시가지를 어슬렁거리며 걷다 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중심가에서 벗어난 뒤 골목에 위치한 레스토랑은 무엇보다 조용히 혼자 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레드와인 한 잔과 애피타이저로 프로슈토 살라미 플레이트를 시켰다.

호숫가지만 왠지 해산물을 잘 할 것 같은 생각에 해산물 요리를 하나 더 주문했다. 바구니에 담긴 바게트 빵을 하나 꺼내어 진한 올리브오일을 뿌린다. 빵 위에 살라미나 프로슈토를 얹어서 크게 한입 베어 먹고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점점 배가 불러와서 주문한 해산물요리는 취소했다.

두 시간 동안 천천히 고작 한 메뉴를 먹는 바람에 서버들이 계속 왔다갔다가 했다. "괜찮니?" "더 필요한건 없어?" 나중엔 "너 정말 천천히 먹는구나." 엄지를 척 들어 인정해줬다. 음미하는 중 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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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다가 책도 읽다가 사진도 찍고 수첩을 꺼내서 끄적이다 보니 어느덧 오후 3시가 다 되가는 시간. 지나가는 행인들이 나를 한번 흘끔 보고는 입구에 메뉴판을 물끄러미 보더니 반은 그냥 지나가고 반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왔다. 살라미와 프로슈토는 당분간 안 먹어도 될 정도로 양껏 먹었다. '카페 마끼야또'를 시켰다. 제대로 된 커피가 나왔다. 아침의 카푸치노 맛은 금방 잊었다. ‘이탈리아 커피는 맛있는데 가격까지 싸다니 이건 반칙이야. 너무 매력적 이쟎아.’ 겉모습이 멋진 남자가 성품도 좋고 매사 긍정적이고 낭만적이고 배려심도 깊은 비현실적인 캐릭터처럼.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니 날이 슬슬 개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빌릴 곳을 찾았다. 한 시간에 5유로. 밀라노에서 타던 자전거 비슷한 아이를 골랐다. 앞 바구니에 가방도 넣고 길 따라 달린다. 큰 도로를 달리다가 적당한 골목으로 들어가니 호수가 옆을 길 따라 갈 수 있었다. 바람이 제법 불었지만 자전거 페달에 몸은 더워졌다. “아 시원해!”이 기분이었다. 밀라노의 우둘투둘한 돌길을 중고자전거로 달리던 그 상쾌한 기분. 자유로운 바람에 몸을 맡기는 기분. 호숫가를 바라보는 벤치에 앉아서 쉬다 사람들과 개 구경을 실컷 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할 얘기가 많은지 벤치에 앉은 남녀는 쉴 틈 없이 얘기를 하고 있다. 대화의 톤으로 봐서는 사랑을 속삭이는 것도 싸우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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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드타운 시내로 들어갔다. 젤라또를 안 사먹었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기 때문이었다.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밀라노로 돌아오는 기차 옆자리 이탈리아 아저씨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왔다. 그는 영어를 못하고 내 이탈리어 실력이라곤 뻔하니 서로 바디랭귀지가 반이다. 이걸 대화라고 할 수 있을지.

알아들은 바에 의하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아저씨도 한 달 동안 독일을 거쳐 동유럽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유럽 사람들에게 여행은 정말 일상처럼 가까운 일이라는 걸 매번 느낀다. 10년 전 에딘버러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스페인 아저씨는 아일랜드에서 택배 일을 하면서 휴가 때마다 고성여행을 한다고 했었다.

일상을 좋아하는 일로 채워나가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이 깊어진다. 중앙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탈리아 여행 첫날. 찬바람에 자전거를 탄 탓일까 감기기운이 으슬으슬 느껴졌다. 혹시 몰라 가져온 쌍화탕을 가방 깊숙이에서 찾아내어 원 샷. 감기엔 쌍화탕이라는 엄마의 진리를 밀라노에서 실천하며 침대에 누웠다.

회색도시. 회색 방. 여행의 느낌도 아직은 정체불명의 그레이 칼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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