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농가민박, 아그리투리스모를 찾아 며칠 동안 검색했다. 스마트 폰 하나로 여행일정을 짜면서 여행책자와 종이지도를 갖고 다니던 여행은 마치 구석기 유물처럼 느껴졌다. 당시의 나는 머나먼 옛날 사람처럼 지금은 사이보그라도 된 양 진화한 듯 착각마저 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고대에서 중세로, 근대로 그리고 현대로 넘어온 것처럼 저 너머로 가는 터널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럴수록 느리고 불편한 것들이 좋아지는 요상한 취향을 끄집어낸다. 시골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굳이 이탈리아의 시골마을로.
그렇게 시작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을 만한 숙소를 찾는 일.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란 모든 것을 다 갖춰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잘 갖춰진 관광지다운 느낌보다 진짜 “집" 같은 편안함을 풍기는 곳이 필요했다. 관광지와 집, 둘의 간극을 잘 헤아린 장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생각해본다. 너무 꾸미지 않았으면 좋겠다. 꾸몄다 하더라도 본연의 멋을 헤치거나 어색하지 않았으면. 여행하는 장소 그대로의 소박한 느낌을 드러낼 줄 알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은 자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그렇다. 자신을 알맞게 꾸미고 소박한 가운데 우아함이 언뜻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이 편안함을 주고 멋진 것처럼 말이다.
수십 개의 아그리투리스모 사진 수백 장을 봤다. 어딘가 부족했다. 다른 점이 다 맘에 들면 화려한 침대헤드가 눈에 걸리는 식이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곳이 있었다. 흰 도화지의 하얀색 바탕에 절제된 색감으로 구성된 공간이었다. 망설임 없이 바로 예약을 했다. 피렌체에서 동행들과 만나 렌트카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비가 오던 피렌체 아침의 회색빛 하늘은 토스카나 평야를 만날 즈음엔 하늘 사이로 미세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비 포장된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니 예약한 아그리투리스모가 나왔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시골 산골짜기에 주차를 하고 나니 양평 펜션에 놀러온 것 같은 기분이랄까. 조금은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키가 제법 큰 긴 곱슬머리의 여자가 (큰 입이 매력적인 그녀는 줄리아 로버츠를 닮았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자매가 운영하는 이곳은 20여년이 되었다고 했다. 원래는 미국사람이 쓰던 별장이었는데 인수를 해서 기존의 느낌을 해치지 않고 하나씩 고쳐나가고 있다고.
이곳의 감각은 살아 움직인다. 무심코 놓은 것들은 죄다 자연스럽고 강력하다. 삶에서 생활에서 나온 감각이다. 최신유행을 읊는다고 감각이 뛰어난 것이 아니다. 요즘 한정판 콜라보레이션 운동화를 장착했다고 멋쟁이가 아니다. 그건 감각이나 패션이 아니라 소비다. 소비를 하는 것과 감각이 좋은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
사람 자체에 시간과 함께 스며든 태도와 삶의 감각은 굳이 무리한 소비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곳은 자연스러운데 촌스럽지 않다. 절제되고 통일감이 있으며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감각이 공간전체를 감싸고 있다. 책으로 공부하거나 남들이 좋다는 것을 좋다고 함으로써 감각을 쌓아온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단 공간에 대한 꾸밈뿐만이 아니었다.
아침식사는 종류는 적었지만 충분했고 정갈했다. 놀라운 점은 매일 아침 음식의 배치나 식기 세팅이 바뀐다는 점이었는데 그 감각은 매번 신선하고 새로웠다. 오믈렛을 주문하면 로즈마리 잎을 항상 꽂아 주었다. 정원에 군데군데 놓인 의자는 자연과 한데 어우러질 수 있을만한 장소에 놓여 있었다. 인위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원래 이곳에 있었다는 듯이 초연하게 모든 사물들이 자연과 함께 있었다.
작고 정성이 담긴 것, 대량이나 다량이 아닌 것이 주는 즐거움. 이야기가 담긴 소중한 소재들이 애틋한 삶이 되는 과정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그리투리스모를 둘러보다가 자매 중 동생의 남자친구를 만났다. 이탈리어는 한 마디도 못한다고 소개한 남자친구는 호주에서 뱅커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일하다가 시간이 나면 여자친구 집으로 휴가를 온다는 말에 어찌나 부럽던지. 이곳에 머무는 3박 동안 종종 그를 마주쳤다. 선한 인상에 성실해 보이는 남자친구는 썩 잘 어울리는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나무 가지치기를 하거나 짐 가방을 나르거나 했다. 뭐든 꽤나 열심히 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서툴러 보여서 피식 웃음을 짓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