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나 소도시 여행
어느덧 오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발도르차 평야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늘어선 장소에 가기로 했다. 사진 한번 근사하게 남기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길 따라 펼쳐지는 토스카나 초원과 하늘의 조화에 감탄하며 지나가는 오토바이 무리들에게 손 까지 흔들어주는 여유를 부렸다.
아마도 한 시간쯤 달렸을까. 꼬불꼬불한 언덕을 넘어 자동차 네비를 따라 간 곳에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보이질 않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보고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비슷해 보이는 평야와 수십 그루의 사이프러스 나무를 지나쳤다.
가려던 곳은 결국 못 찾고 갑자기 다들 엄청난 피곤함을 느꼈다. 한 오후 2시 즈음 이었던 것 같다.
한 명이 “귀에서 웅웅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애. 고지대라 그런가?”
“아 그래?”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나도 곧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침부터 이상하게 피곤하긴 했었다. 다른 두 명도 컨디션이 별로라고 했다.
갑자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크게 웃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했는데 피곤을 느끼다니 다행이야. 행여나 건강한 20대 동행분이 있었더라면 우린 정말 큰일이었을 거야. 하하.” 이런 호들갑으로 다들 오늘은 쉬기로 했다. 사랑스러운 아그리투리스모에서!
점심은 파니니를 사서 해결하기로 했다. 살라미와 치즈가 잔뜩 들어간 파니니를 숙소 부엌에 펼쳐놓았다. 올리브오일과 후추를 뿌리니 근사한 한 끼 식사가 되었다. 벌써 오후 4시가 다 되간다.
다들 방에서 쉬면서 오후의 한가로움을 즐기기로 했다. 책 한권과 끄적거릴 노트를 들고 수영장으로 나섰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담요로 몸을 돌돌 말았다. 남자커플로 보이는 독일남자 둘이 번갈아 한 번씩 수영을 하더니 내 옆 썬 베드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커플과 나, 쪼르르 줄지어 썬 베드에 누워서 담요를 말고 책을 읽는 모습이라니. 이것이 바로 토스카나에서 오후를 보내는 방법 아닐까. 혼자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가져온 책 중 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을 읽기로 했다. 여행에서 읽는 타인의 여행조각들. 어느새 주변 공기가 여행에서 또 다른 여행으로 빠져드는 시간으로 변한다. 여행 중 이른 새벽이나 잠시 여유가 생길 때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에 빼곡히 적고 클래식음악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집어 든다. 혼자만의 시간에 하지 않은 일은 SNS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특별한 일정이 없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다는 건 사소한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로 한다는 것 아닐까.
수영장에 앉아 책 한쪽, 하늘 한번 바라보는 여유를 갖는 오후. 마침 노을 지는 하늘은 수백 가지 표정을 가감 없이 내보여줬다. 하늘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연신 찍고 썬 베드에 다시 앉으면 벌써 하늘은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눈에 담는 편이 낫겠다 싶어 멍하니 바라본다. 파란하늘이 차츰 붉게 노랗게 물들어 간다. 하늘이 어찌나 깊고 넓은지 흰 구름이 길게 늘어지면서 도화지의 모든 색들을 흐트러뜨리고 함께 장관을 만들어 낸다.
아름다움은 변하기 때문에 슬픈 것이 맞다. 반대로 찰나의 아름다움은 영원한 것인가 보다. 변하지 않는다는 건 곧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이라는 말 아닐까. 사랑도 변하는 게 맞다. 사람도 변하는 게 당연하다. 본질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형태는 변한다. 나도. 우리 모두. 그래서 사람이고 그렇기에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저녁은 아그리투리스모에서 추천을 받았다.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되 음식의 본질을 놓치지 않은 곳을 추천해줄 것이라는 기대에 맞게 한 음식점을 추천해주었다. 몬테폴로니코에 있는 식당이라고 했다. 주변에 몬테풀치아노, 몬탈치노 등 비슷한 이름이면서 와인으로 유명한 도시들이 있지만 몬테폴로니코는 처음 들어보는 도시다. 이 작은 도시에 식당이라곤 두 세 개가 전부라고. 그 중 한 오스테리아. 오스테리아는 레스토랑보다는 캐주얼한 음식점을 가리키는 이탈리어다. 어두컴컴한 골목길로 들어서자 불빛이 새어나오는 유일한 문이 있었다.
마치 해리포터가 지하철 벽을 뚫고 지나가듯 문을 조심스레 열자 "바로, 지금 여기"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소리와 냄새. 병을 가득채운 붉고 투명한 탐스런 와인들이 벽면을 보기 좋게 차지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곳은 토스카나 음식의 천국이라는 음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했다.
우리는 2층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미국인 60대 부부가 테이블에서 와인 잔을 기울이며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은 흥분을 감추기 힘들다는 듯 격양된 목소리와 상기된 얼굴로 이탈리아 찬양에 나섰다. “이 음식 좀 봐. 이 와인은 또 어떻고. 아! 정말 아름다운 저녁이야.” 그랬다. 미국 아저씨의 말은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토스카나의 이름 모를 작은 도시 오스테리아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저녁이라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여행의 하루.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 충만한 느낌의 하루였던 오늘. 여행은 몸과 생각을 뒹굴 거리는 시간, 하늘, 음악, 책, 노트와 연필 한 자루, 카메라만 있으면 충분하다. 자아고민을 위한 혼자 여행을 꿈꾸었지만 여자 넷이 함께 하게 된 토스카나 여행은 내게 이렇게 말해주는 듯 했다. 인생은 때로는 의도와 다르게 흘러가지만 그 안에 분명 웃음과 더 큰 뜻이 있다고.
“심각하게 생각할게 뭐 있어, La vita e bella! 인생은 아름다운거야. 그러니 지금의 너를 사랑하고 이 순간을 즐겨!”라고 이탈리아가 내게 말하는 듯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