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호 그리고 보람 Sep 08. 2019

[윤] 해외 거주 도전기(1)

이민 참 어렵다. 어렵다. 너무 힘들다. 비자라도 받으면 괜찮을 텐데.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한 커플로, 말레이시아에서 거주 중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2018년 1월, 나는 한국 나이로 31살이 되었고, 토론토의 겨울은 추웠다.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는 난생처음 겪어봤는데 덕분에 마음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당시 나는 생업을 이어가기 위해 카페에서 하루 8~9시간씩 커피와 샌드위치를 만들었는데, 내가 일하던 카페는 오피스 빌딩 안에 위치해 있어서 오며 가며 창문 너머로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저렇게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커피를 만드는 것은 내가 평생토록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돈도 더 벌고 싶었고. 외국에서 사는 것은 여전히 재밌었지만 시급 1달러에 목메며 일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비로소 생활이 유지되는 삶은 벗어나고 싶었다.


2018년 토론토는 4월까지 눈이 왔다. 몸도 춥고 마음도 추웠다.


사실 나는 호주에서 살 때 커리어를 쌓고픈 분야가 뚜렷해져서 캐나다에서의 유학 후 이민을 고려하고 있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돈과 영어점수였는데, 둘 다 충족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유학에 필요한 비용은 어머니께 부탁하고 나는 매일 저녁 독학으로 ITELS를 공부했다. 입학에 필요한 점수는 Academic 6.5였는데, 이미 이전에 봤던 시험에서 나는 6.0을 받았다. IELTS의 응시료는 캐나다 달러로 약 CA$300, 당시 환율로 25만 원이었다. 최저시급을 간신히 넘는 내 수입으로는 시험에 응시하는 것 자체가 살 떨리는 일이었다. 그래도 0.5점이 모자라는 것이니 다음 시험에서는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낮에는 카페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의 삶을 견뎠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치른 시험에서도 계속 6.0이 나왔다. 현지 유학원에 문의해보니 자체 입학시험(다행히 공짜였다!)을 보는 대학교도 있다고 하여 시험을 보러 갔었는데, 입학시험에서도 IELTS 6.0에 상응하는 점수가 나왔다. 결국 점수를 맞추지 못한 채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만료돼서 5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는 학원에까지 다녀가며 다시 ITELS 공부를 시작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돌아와서 영어공부를 하니 되려 마음이 편했고 어쩐지 공부도 더 잘되는 것 같았다. 그 덕분인지 귀국 한 달 후에 친 시험에서 비로소 나는 원하는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보람이를 만났다.


이때만 해도 모두가 내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도 그랬고.


당시 나는 2019년 여름 즈음에 입학을 할 예정이었는데, 마냥 놀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1년 정도 일할 수 있는 계약직으로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돈도 모으고 굳어버린 뇌도 다시 살려보려고 했는데, 인생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시려고 노력하는 어머니께서도 유학 비용의 압박 앞에서는 결국 지원을 해주시기 어렵다는 의사를 내비치셨다. 사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한 두 푼이 드는 일이 아님을 잘 알기에(3년 코스에 학비만 대략 4,000만 원 정도였다) 우선은 유학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그래서 보람이와 함께 비자도 해결이 되면서 생활비가 적게 드는 나라(ex. 태국, 포르투갈 등)로의 이주를 고려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다니던 회사에서도 TO 부족으로 인해 계약 연장이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모든 일들이 2019년 봄 즈음에 동시에 일어났다. 목표를 향해 그동안 노력해 왔었지만 순간 방향을 잃었다고 느꼈는데, 고용 안정성까지 위협받게 되어 다시 직장을 구해야 될 상황에 처하자 심적으로 지치고 예민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옆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보람이는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윤호, 이왕 이렇게 된 거 외국에서 일할 수 있는 곳도 같이 찾아보면 좋지 않을까?



듣고 보니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어차피 나는 다시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인데, 굳이 한국으로 그 범위를 한정시킬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외국에 나가서 맨땅에 헤딩하는 방법도 있긴 하겠지만, 만약에 일자리를 구해서 나간다면 경제적 안정 및 비자 면에서는 금상첨화 아닌가? 게다가 내 영어점수는 아직 유효하였고 구사력도 심각하게 하락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외국에 있는 회사들에도 이력서를 내며 다시 구직 시장에 뛰어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윤] 부당함을 참지 않기로 결심한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