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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호 그리고 보람 Sep 18. 2019

[윤] 해외 거주 도전기(2)

아아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Tinder에서 만나 결혼을 한 커플로, 말레이시아에서 거주 중입니다.
함께 글을 쓰면서 번갈아 가며 올리고 있습니다. 제목의 [윤]은 윤호의 글, [보]는 보람의 글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곧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회사는 크고 유명한 데다가 스포츠웨어를 다루는 곳이어서, 운동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꿈에 그리던 곳(내 첫 출근날 이틀 전에 현재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선수가 다녀갔다고 했다...)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급여 수준은 역대 내 커리어를 통틀어서 가장 높았으니 이만하면 훌륭한 일자리였다. '그래, 적당히 일하면서 돈도 좀 모으고 회사 네임벨류를 살려서 나중에 외국에 가서 취업할 때 어필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라고 생각하며 출근을 하고 첫날을 보냈는데, 하루 종일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듣자 하니 나의 주요 업무는 각 부서에서 마케팅 업무에 필요한 상품들을 취합하여 2주에 한 번씩 오더를 넣는 것이었는데, 가장 큰 챌린징은 각 부서의 담당자로부터 주문을 받아 기한 내까지 취합하는 것이었다. 일의 단조로움은 둘째 치고, 2주마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아쉬운 소리(인수자의 경험에 따르면 1년 동안 단 한 번도 기한 내에 취합이 된 적이 없다고 했다)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첫날인지라 차마 겉으로는 내색도 못하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는데, 오후 5시쯤 메시지를 하나 받게 되었다.


윤호님, 영어시험 통과를 축하드립니다. 다음 면접을 위해 일정 조율을 했으면 좋겠는데 언제가 편하신가요?

해외취업을 하는 경로는 여러 곳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 월드잡(https://www.worldjob.or.kr)이라는 사이트를 가장 많이 들여다보았다.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구직 방법은 인맥을 쌓아 해외의 기업에 직접 오퍼를 넣는 것(또는 제안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어느 나라로 갈지조차 정하지 못한 데다가 해외로의 취업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아서, 그나마 한국인이라는 이점을 살려서 취업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기 위해서 주기적으로 월드잡 사이트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열거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는 느낌은 거의 없었지만... 참고에는 유용하였다.


그러던 중 말레이시아의 한 회사에서 '데이터 분석을 통한 기업 디지털 마케팅 지원 업무' 담당자를 한다는 채용공고를 보게 되었다. 나는 늘 데이터 분석 분야에 발가락이라도 담그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 있고, 이미 말레이시아에서 2년 정도 일하고 있는 동생으로부터 말레이시아에 대한 이야기도 여러 번 들은 데다가, 2018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1주일 정도 여행을 다녀왔을 때의 느낌도 나쁘지 않아서 시험 삼아 지원해 보았는데 1시간 만에 JD와 근무조건이 상세하게 담긴 메일을 받게 되었다. 메일을 읽어보니 근무조건이 나쁘지 않아 보여 지원을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곧 자체 온라인 영어시험을 응시해달라는 답변이 왔다. 리스닝, 리딩, 라이팅 및 스피킹이 포함된 시험이라고 했는데 내심 'IELTS까지 보았는데(사실 무려 1년 전이었다) 어려워봐야 얼마나 어렵겠어'라는 생각으로 응시를 했다. 그리고 1시간 뒤 나는 해외 취업에 대한 꿈을 잠시 접어둬야 되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과 함께 우울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이 새로운 회사의 첫 출근일이었으니까.



다시 출근 첫날로 돌아와 보자. 내 마음은 하루 종일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기껏 꿈꾸던 회사에 들어갔는데 맡은 업무 내용을 보아하니 일의 재미는커녕 잘 해낼 자신조차 없었고, 내 영어는 해외에서 일하기에는 전혀 충분해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연히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다음 면접의 일정을 논하는 연락을 받게 되어서 살짝 어안이 벙벙했다. 어찌 됐든 우선은 면접이라도 보는 것이 낫겠다 싶어 면접 일정을 조율하면서 퇴근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여전히 찝찝한 마음을 가진 채 출근길에 올랐다. 인수인계를 받고 있는 중이니 만약에 그만둘 거면 하루라도 빨리 그만두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나 싶다가도, 새로운 회사의 면접에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는데(최종 합격률은 20% 내외라고 메일에 친절하게 명시해 주셨다), 그러면 내가 이 회사에서 계속해서 일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 일하면 모두에게 폐 끼치는 일이지 않을까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여기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는 은근히 걱정이 많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쉽게 못하는 성격이다)을 품은 채 잠실역에서 환승을 하러 가고 있는데 새로운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


윤호, 출근 잘하고 있어?


여담이지만 나는 가끔씩 '어쩌면 세상에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보람이는 프리랜서로 강사여서 일이 있는 날은 꼭두새벽부터 준비할 때도 있지만, 일이 없는 날은 보통 출근시간보다는 늦게 일어나기 때문에 그런 날은 출근하면서 서로 연락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날은 보람이가 일이 없는 날이었기 때문에 출근길에 연락을 받은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답답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복잡한 2호선 안에서 나는 보람이에게 전화를 걸어 내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가만히 내 얘기를 듣던 보람이는 이윽고 내게 말했다.


그러면 빨리 그만두는 게 나을 것 같아. 설사 다음 면접이 떨어진다고 해도 일이야 다른 데서 또 구하면 그만이잖아. 그렇게 마음이 불편해서 계속 일 할 수 있겠어?


어찌 보면 당연한 답변이지만 보람이의 한 마디는 그 날 내게 가장 필요한 조언이었다. 덕분에 강남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마음을 굳힐 수 있었고, 한 시간 뒤 나는 다시 실직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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