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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은 Apr 17. 2024

불면의 오만

왜 늘 눈 앞에서 사라지는 종류의 것들은 없어진 후에야 빛나 보일까


1년이나 잠들어 있었던, 일기 메모장을 다시 열었다. 생생한 심장의 박동을 옮겨놓은 조각 글들이 지나간 순간의 질감이 되어, 별같이 박혀 있었다. 그때는 그냥 매일,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일상이었는데, 왜 늘 눈 앞에서 사라지는 종류의 것들은 없어진 후에야 빛나 보일까.


어제 밤에는 또 잠에 들기 어려웠다. 소화도 안되고 몸이 아팠다. 그저께는 또 다른 이유로 밤이 길었다. 어느 시점에 아침이라는 것이 다시 올까, 간절하다 못해 기다리기를 포기한 눈꺼풀 아래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래도 내가 잠들기 전에 뜨는 해는 항상 별로야. 불면이 성가신 새벽은 행과 불행 어느 하나에도 도달하지 못한 가로축 아래의 침전물 비슷했다. 그러다 여느 때처럼 어느 때에 잠이 들었고.


시침이 땅과 수직해갈 때쯤 눈이 떠졌다. 분명 꿈에서 이상한 장면들이 스쳤던 것 같은데, 꿈이라는 녀석은 잠깐 스치다 증발하는 종류의 입맞춤 같다. 희미한 기억을 엉성하게 더듬으면, 우울한 사람들끼리 잔뜩 모여있었다. 뇌의 감정을 측정하는 듯한, 동그란 의자 안에 들어가 머리에 무언가를 꽂고 동글 동글 돌아가는 기계 속에 너는 들어앉아 있었다. 나는, 어딘가에 취해서 기계의 움직임과 똑같아진 너의 감은 눈을 보고 있었다. 기계가 돌아감에 따라 스르륵 넘어가는 너의 머리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와 눈을 마주치진 않을까 불안해 하면서. 그리고 또 어느 장면에서, 기계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나를 무표정하게, 그러나 많은 말이 담긴 눈빛으로 응시하는 너도 보인다. 그런 눈빛을 보내준 사람은 꿈 밖에서 아무도 없었다.


꿈과 현실 사이 몽롱한 경계선 위, 꼬여있는 나의 스텝은 꿈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커튼 사이 얇은 빛은 그 반대에서 나를 당겼다. 제 구색을 갖추지 못하고 누덕한 옷을 입은 문장들이 머리 속에 휙, 휙 날아다니고, 해. 해가 뜬 것이다. 왜 한때 간절하던 것들은 저렇게 태연한 모습을 하고 이미 다가와 있는지. 무언가를 얻으면 참 행복하겠다는 식의 간절함은, 그저 손아귀에 얻으면 그만인 우리의 욕심을 오만스럽게도 간과한다. 앞으로는 메모장을 머리 맡에 두고 자야겠다. 꿈의 경계에서 출렁일 때의 글자들이 남아주면 좋겠어. 허름한 말마디들이지만 그래도.


큰 창이 난 쪽에 있는 내 책상에 앉았다. 상판 아래까지 내려져 있는 블라인드를 보며 다행이다, 생각한다. 그 옆 내려지지 않은 블라인드 밑으로 들어오는 쨍하고도 묽은 하늘이 조금 불만스러웠다. 일단 눈이 부시고, 얼굴이 그을릴 것 같고, 창 밖을 보다가 흰 벽을 보면 시퍼렇게 그어지는 잔상들이 징그럽고… 그토록 바라던 아침이 오고 빛이 드는데 나는 도망치는 방법을 궁리했다. 열려있던 블라인드를 마저 닫아버리고 말았다.


이러다 밤이 되면 푸석한 질감으로 굳어져버린 햇빛을 사무치게 그리겠지. 그럼에도 나는 햇살의 박동에 늘 소홀하다. 눈 앞에서 사라지면 그제야 소중함을 알아 차린다는 우리의 무지함을, 간과하는 일이 나의 오만임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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