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든 피겨스> 실제 주인공 캐서린 존슨의 별세를 기리며
영화 <히든 피겨스>는 미국과 러시아가 치열하게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데에 소련이 미국을 앞질렀고, 이에 충격을 받은 NASA는 우주 개발에 더욱 더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NASA의 흑인 여성들이 큰 활약을 하게 되는데, 당시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그들이 나아가는 모습과 NASA의 로켓 발사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 같아 인상깊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실력을 발휘하는 캐서린에게 가장 힘든 상황은 바로 화장실에 가는 것이었다. 흑인들이 갈 수 있는 화장실(colored ladies room)이 멀리 떨어진 건물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당한 차별에 대해 알게 된 NASA 우주 개발 프로젝트의 책임자 해리슨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 영화를 보며 나는 캐서린이 일하는 건물에도 흑인이 출입 가능한 화장실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아주 편견에 갇힌 생각이었다.
해리슨은 흑인 전용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colored ladies room' 표지판을 부순다. 이 장면을 보면서, 차별에서 평등으로 나아가는 것은 무언가를 더 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기존에 규정지어진 것을 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차별을 부수는 이 간단한 해법에 놀라는 내 자신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가진 편견을 인식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나가는 NASA가 소재로 쓰인 것은 흑인여성들의 인권 성장과 겹쳐보이면서 시각적인 효과를 더한다. 캐서린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도 새로운 수학 공식이 아니라 기존의 수학공식을 다시 봄으로서 풀어낸 것 또한 주제를 잘 표현해주는 서사적 장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차별에서 평등으로 나아가기 위한 해법은 무언가가 새로운 게 필요한 게 아니라, 기존의 것들을 다시 보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한편, 백인들로 대표되는 NASA 고위직들에게 인정받는 게 주인공들의 성공처럼 묘사되는 것은 영화가 갖는 한계이자 아쉬움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는 초반에 흑인여성들이 당시에 겪어야 했던 차별을 계속해서 보여주며 이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없을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인공들이 가진 능력과 이를 알아주는 백인의 등장으로 문제를 쉽게 해결해버린다. 세 명의 주인공들이 가진 각각의 역경들의 극복 과정을 모두 보여주다 보니, 개인이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겪었을 내적 갈등과 매순간의 감정들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것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가 말하는 평등사회는 무엇일까. 진정한 평등사회는 누구나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달에 닿고자 하는 인류의 꿈이 이루어지기 전, 영화의 마지막에서 캐서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We're already there, sir.
이미 그 곳에 가있는 우리를 상상할 수 있는 사회, NASA에서 보여준 그들의 활약을 통해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어떠한 한계나 제약 없이, 누구나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꿈꾸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화장실의 표지판을 부수었듯이 내가 누군가에게 붙인 표지판을 부수는 데에서 출발한다.
3년 전쯤 영화를 보고 너무 감동 받아서 블로그에 쓴 글인데, 캐서린 존슨의 별세 소식을 듣고 브런치에 글을 다시 업로드.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50년대와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오늘날을 비교해보았을 때, 흑인에 대한 차별은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또다른 혐오와 차별 그리고 편견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요즘. 2020.02.25 RIP 우주 영웅 캐서린 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