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별 생각이 다 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루 9시간 동안 하는 일이라고는 산 속을 하루 종일 걷는 일.
그리고 걷다 잠시 빙하 머금은 바람과 그 빙하를 만들어내는 설산과 눈앞의 설산과는 대조적인 푸른 나무들을 느끼는 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연을 느끼기만 해도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 수 있구나.
아무런 자극 없이 9시간을 걷다 보니 온몸의 감각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
5일 치 식량을 매고 걸으려니 아... 배낭이 무지하게 무거워서 어깨가 무지하게 아프다. 죽을 것 같다.
뇌는 몸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어깨에 크로스로 매고 있던 쌕을 허리에 바꿔 매니 살 것 같다.
위치 조금 바꿨다고 죽을 것 같다가 살 것 같다니.
조그마한 변화라도 '아 이제 살 것 같다'며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매번 있었다.
정말 작은 것이다.
쌕을 허리에 바꿔 맸는데도 다시 어깨가 아파 가방 끈을 내 몸에 맞게 조정을 했더니 살 것 같았다.
너무 더워서 바람막이를 벗었더니 살 것 같았고, 모자 하나에. 선글라스 하나. 운동화 끈 고쳐 매기. 머리를 묶었을 뿐인데.
심지어 모자 창을 10도 돌렸을 뿐인데 살 것 같다.
거창하지만 인생이 이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물리적 심리적 변화에 죽을 것 같다가도 살아진다.
심지어 행복해지더라. 물 한 모금에.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의 인사 한 마디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은 그 행복을 나누고 싶어 다시 인사하게 된다.
나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작은 변화와 행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