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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느 Aug 21. 2020

소나기

2%가 부족한, 내겐 너무 살뜰한 당신


기차를 타고 친정에 내려가기로 한 날이었다. 다 큰 아이들은 따로 오기로 하고 둘만 가는 오붓한 여행이었다. 오랜만에 기차 좌석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아이팟을 나누어 끼고 음악을 들으려고 최신 발라드까지 엄선하여 내 폰에 저장해 두었다. 여기에 커피 마니아인 우리 부부가 애정하는 원두커피만 있다면 완벽한 추억여행이 되리라 전날부터 잠을 뒤척이며 마음이 설레었다. 여행가방은 미리 대충 챙겨 놓았으나 아침을 먹고 나니 설거지 후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여름철에 그냥 실내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딱 걸렸다.


 고맙게도 남편이 흔쾌히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고 오겠다고 했다. 남편의 친절에 감사하면서, 무거운 트렁크를 싣고 갈 콜택시를 전화로 호출하고 남편이 올라오면 함께 내려가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트렁크가 무거우니 본인이 돌아올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살뜰한 애정표현을 한 후 남편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쥐고 경쾌하게 내려갔다.
 
그 날 따라 콜이 빨리 잡혔는지 남편이 음식물 쓰레기통을 가지고 내려 간 후에 바로 기사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아마 바로 집 근처를 지나는 택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비가 곧 올 듯 말 듯하더니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길에서 택시를 세우지 않고 콜택시를 부르길 잘했다고 선견지명이 있었던 나 자신에게 기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 빗속에 우산을 받치고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택시 정류장까지 갔다면 우리는 둘 다 물에 흠뻑 젖었으리라. 우리 부부를 충전시켜 줄 로맨틱한 기차여행은 지혜로운 아내의 탁월한 선택으로 안전하게 잘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쓰레기를 비우러 간 남편은 아직 채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콜택시 기사로부터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아파트 입구가 협소하고 주차장이 비좁아서 임시 정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마주 오는 차에게 자리를 비켜주느라고 기사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거 좀 빨리 내려오세요.” 기사의 목소리에 섞여 택시를 옆으로 빼 달라고 하는 경비아저씨의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아파트 앞 교통체증을 익히 아는 나는 화들짝 놀라서, 남편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먼저 무거운 트렁크를 끌고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남편도 다 차려입은 터라 밖에서 바로 택시에 탑승하면 될 일이었다. 얼굴도 못 본 기사의 볼멘소리에 마음 약한 나는 서둘러 트렁크를 끌고 내려갔다.


이미 콜택시 기사는 미리 입구에 내려와 대기하지 않았다고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거기에 일행이 지금 집에서 내려오는 중이라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한 번 내 얼굴을 휙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않는데 할 말을 잃은 눈치였다. 좁은 택시 안에서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남편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빨리 내려와야 한다고 재촉했다. 최대한 서둘러서 내려간다는 남편의 답을 듣고 잠시 기다리는데 갑자기 폰의 벨이 울렸다.
 
“나 운동화 바닥이 갑자기 헤어져서 다른 걸로 갈아 신어야 해. 조금만 더 기다려!”, 애타게 기다리던 남편의 전화였다.
 "아니 지금 기다리는 거 몰라? 무슨 얘기야 대체? 다시 집으로 올라가야 한다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우리 대화 내용을 엿들은 기사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참, 나!”를 연발했다.


결국 근검절약하는 남편이 택시에 타기 전에 얼른 추가 대기 요금 5000원을 자원해서 지불하고 말았다. 소나기는 점점 더 거세게 쏟아지고 그러고도 한참 후에 남편은 내려왔다. 적당한 운동화를 찾느라고 신발장을 다 뒤진 듯했다. 우산도 제대로 못 쓰고 비에 흠뻑 젖은 남편이 차에 타자마자 “왜 그렇게 콜택시를 빨리 불러서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해”하며 짜증스럽게 뱉었다.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러 버렸다. “그러니까 운동화 새로 사라고 했잖아!”  
택시가 출발한 후 기차를 타고 나서야 알았다. 우리가 고대했던 스페셜 브랜딩 원두커피도 식탁 위에 버려졌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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