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아티스트 갤러리
이제 나는 뭐가 되지 않아도 좋다!
그림을 그만 둔지 참 오래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지가 언제였던가? 아마 고등학교 미술시간이 마지막이었겠지. 여고시절 우리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미술 선생님은 생글생글 웃으시며 책상 사이를 다니시면서 '잘된 작품'을 골라서 칠판 아래에 게시하셨다. 그 그림들은 쪼르르 칠판 아래 백묵이 놓이던 자리에 놓였는데 마치 작은 갤러리 같았다. 짙은 녹색 배경이라 그림의 채색이 다 발현되진 못했어도 거기에 오르는 건 무척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선생님이 지나가다가 내 옆에서 잠깐 머무시면 행여 내 그림이 뽑히나 해서 가슴이 떨려왔다. 잠시 멈추시던 선생님이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가면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마음 한구석의 그 허망함이란.... 그렇게 뽑힌 작품들 중에 A와 A+를 부여하시곤 했기 때문에 더 선택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당시 공정성의 잣대를 그렇게 합의를 통해서 이끌어내시려고 하던 분이셨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그렇게 게시되던 그림들 중의 하나라고 할까? 그런데 상위 1%는 물론 아니었다. 거기엔 미대를 준비하던 짱짱한 친구들이 전문적인 그림을 그렸으니까 그저 나와 한 차원은 다른 수준 높은 그림을 감상하는 걸로 만족했다.
중학교 시절에도 나는 미술시간을 좋아했다. 지역에서 화가로 활동하시던 담당 선생님은 미술실을 본인 작업실 겸 전도유망한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도록 개방하기도 하셨다. 방과 후에는 본인이 선정한 학생들이 미술실에 와서 그림을 그리도록 하셨다. 그 3명에 뽑혀서 어깨를 우쭐하면서 새로 산 스케치북과 물감을 가지고 미술실을 한동안 들락거렸다. 그런데 그놈의 입시가 뭔지 고입을 앞두고 시험공부를 하다 보니 미술실 가는 시간이 띄엄띄엄하다가 선생님의 호의에 답도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림 공부가 그 당시엔 돈 많이 드는 부자들의 취미생활로 여겨지던 터여서 그림을 열심히 해서 내 미래와 연결시킬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끔 미술시간 샘플로 쓰이던 내 그림의 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못다 한 그림의 아쉬움은 대를 물려 딸아이에게 갔다. 딸아이는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덕분에 그때 못다 한 그림도구들을 많이 구경했다. 딸이 손재주가 있고 시작했다 하면 나와는 달리 마음에 들 때까지 매달리는 집념이 있어서 미대에 진학했다. 물론 그림의 역량은 전문가 아닌 눈으로 보기에도 달라 보였다. 이제 그림은 딸아이에게 물려주고 한평생 나는 그림을 그릴 일은 없을 걸로 생각했다. 그저 나이 들어 시간이 나면 막연히 나는 그림을 다시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있었던가 보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나서 내 블로그 이웃 중에 매일 그림을 그리는 분이 있었다. 함께 손그림을 그리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나도 함께 끼어서 2개월간 그림을 그리는 단톡 방 인증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딸아이가 열심히 그리던 일러스트 책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매일 손그림을 단톡 방에 올렸다. 내가 그 당시 보던 윔피 키드의 원서에서 제프 키니가 그렸던 만화를 똑같이 그려서 처음에 인증했는데 남편이 똑같다고 칭찬했던 그림이라 우선 그 걸로 올려봤다. 그렇게 인증이 시작되고 나니 매일 손그림을 그리는 게 일과 중에 하나가 되었다. 아침 청소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을 들고 그림을 그리려고 종이를 꺼내서 뭔가에 집중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매일 단톡 방에 올라오는 그림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다들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는 건지~~ 내가 그려서 힐링하고 남이 그린 그림을 보고 힐링하고. 프로젝트를 주최하던 이웃은 그 그림들을 모아서 동영상으로 편집해서 단톡 방 안에서 감상할 수 있게끔 해 주었는데 우리만의 작은 갤러리였다. 일러스트, 디지털 드로잉, 만화, 수채화, 유화, 인물화 등 다양한 종류의 그림들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들 일과 육아에 바쁠 텐데 정성을 다 해서 그 날의 그림을 포스팅하고 서로 그림에 대한 피드백을 주면서 참 훈훈한 단톡 방이었다.
지금 그 단톡 방 1일 손그림은 아직도 계속되지만 나는 정해진 날짜가 끝나자 내 발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내 그림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 왠지 내 그림이 초라해서 더는 작품을 올리기가 민망해진 것이다. 매일 1일 1 그림을 하던 그 프로젝트를 제공했던 이웃님은 이제 클래스 101의 취미미술 디지털 드로잉 강사가 되었다. 매일 빠짐없이 그림을 블로그에 게시하던 그녀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색 싸인펜을 놓고 다시 물감과 빠레트를 잡았다. 내가 명암을 넣는 것이 서툴러서 딸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95년생 딸이 말하기를 기초를 가르쳐 주는 영상강의를 찾아서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때는 아프게 들렸는데 기초가 부족함을 느끼고 정말 기초부터 다시 배우기 위해서였다. 뭐 하나 배워서 금방 되는 손기술이 아니란 뜻이겠지. 수채화 기본 교본을 놓고 색을 만들고 물을 섞으면서 초등학교 때 처음 잡았던 수채화를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다. 수채화 교본을 보며 조금씩 원본의 그림과 비슷해지는 데 소소한 기쁨을 느끼며 나는 오늘도 1일 1 그림을 내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고 있다. 나와 같이 손그림을 올리기 시작한 이웃과 서로 피드백을 주고 응원하면서~~
꼭 뭐가 되지 않아도 되는 지금 손그림을 그리면서 행복의 이유를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