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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느 Oct 23. 2020

내 안에 있는 편견과 맞닥뜨린 순간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천사-


 나이가 들어갈수록 편견으로 인해 실수를 저지르거나 후회하는 일이 많이 생긴다. 다양한 채널로 정보를 접하고 직접 경험하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미디어에 의하여 머릿속에 각인된 편견은 특히 내 주변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낯선 곳에서 더 위력을 발휘한다. 나의 편견을 바꾼 이 경험은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불과 두 어 시간이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은 꿈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그녀를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십여 년 전의 일이다. 2009년 1월 우연한 기회에 그동안 염원했던 어학 연수차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구글 지도와 번역기로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그저 내 알량한 영어 구사 능력과 새로 산 스마트폰의 활용능력만 믿고 내가 거주하게 될 지역에 관한 충분한 공부를 하고 가지 않은 덕분에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이 연수의 홈스테이는 어떤 가정인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었기에 내 일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서, 나는 서슴없이 사춘기 십대 청소년이 있는 가정의 홈스테이를 신청했다. 그들의 가정교육과 십대들의 문화를 경험하고 실제로 소통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섣부른 기대는 예상을 벗어나서 정작 홈스테이로 들어간 가정은 안주인이 뉴질랜드 남자와 국제결혼을 한 필리핀 여성으로, 주로 그녀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홈스테이 내내 뉴질랜드식 영국식 발음 대신에 필리핀 악센트의 영어를 듣게 되었다. 거의 필리핀에서 홈스테이하는 기분이었다.


키위 남편(뉴질랜드사람을 키위라 부름)은 일터에 나가든가 식사를 함께 하지 않았기에 거의 대화를 나눌 기회도 별로 없었다. 사춘기의 아이들 역시 한 명은 고교 중퇴에 자유인으로 살고 있어서 잘 보기가 힘들었고 그의 동생도 별로 외국인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나는 그저 그들의 엄마인 안주인이 문 앞에서 노크하고 그들에게 무슨 얘기를 할 때,  그 옆을 우연히 지나가는 척 하면서 오래된 삼성 노트북이 덩그러니 놓인 책 한 권 없는 그들이 쓰는 방을 엿보았을 뿐이다. 음식 역시 안주인의 식성이 반영된 간편식 필리핀 요리여서 뉴질랜드 전통의 가정문화보다는 그만그만한 살림의 뉴질랜드 이민가정의 모습을 경험한 셈이었다.          


홈스테이 첫날 안주인은 내가 어느 정도 영어로 소통이 되는 어른이다 싶었는지 자가용으로 본인의 집에서 어학원이 있는 오클랜드 시내까지 휙 한 번 돌아주었다. 주변을 보니 아시아계 학생과 버스에 같이 타고 열심히 교통편을 설명해주는 현지인도 꽤 눈에 띄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나는 버스 번호와 집 주소만 있으면 얼마든지 시내에 있는 집쯤은 찾아갈 수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해 버린 것이다. 가져간 디지털카메라로 집 주소가 적인 팻말과 그 주변을 몇 컷 찍어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 버렸다.


연수 첫날 홈스테이 안주인에게 들은 바로는 버스 정류장에서 어학연수원까지는 10여 분 거리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 날 막상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 보니 거의 도보 50분 거리가 넘었다. 버스탑승 시간도 훨씬 오래 걸려서 도착시각을 잘못 계산한 터라 어학원에 도착했을 때, 온몸을 땀에 젖어 뛰다시피 했지만 이미 오전 9시 반 배정은 끝났고 1교시 끝나는 벨이 울릴 시간이었다.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그 것도 창피한 노릇이었지만 그 뒤에 올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첫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돌아가는 버스 편을 현지인에게 물어서 겨우 탑승하고 난 후, 홈스테이 하숙집이 있는 ‘코타이가 10번지’에 내리려 하니, 정확한 하차지점을 알 수가 없었다. 버스를 타고 열심히 거리의 표지판을 보면 그 거리도 보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급기야 나를 제외하고 그 버스의 승객들은 다 내렸고 해가 저물려 하고 있었다. 아직도 버스에서 내리지 않은 동양 여자가 버스 기사인들 왜 부담스럽지 않았겠는가?


기사가 나를 부르기에 버스 창밖으로 같은 주소의 거리 이름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주소가 적힌 쪽지를 보여주었다. 하숙집의 사진을 봐도 주소를 보여주어도 이분은 영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한국계였으면 이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 볼 텐데 그 와중에 기사는 중국계였다. 외국 땅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해 보다가 더는 버스 위에서 버틸 수 없어서 결국 대충 아무 데서나 내릴 수밖에 없었다.   

   

주소에 적힌 ‘코타이’가는 하숙집 앞 작은 골목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내가 건네준 주소 쪽지를 보고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을 때 내 인생에서 가장 암담했던 순간이 두 번째로 닥친 기분이었다. 첫 번째 암담한 순간은 첫아이를 낳기 위해서 분만실에 들어간 후 분만이 이틀동안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서 하염없이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그야말로 잠을 잘 수도 없고 아이를 낳지 않고서는 병원을 나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 낯선 외국 땅에서 우리 집도 아닌 남의 집을 한밤에 찾아가야 한다니…. 더구나 내가 타고난 길치임을 내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묵었던 홈스테이 안주인은 전날 말하기를 길을 잃으면 말도 필요 없고, 집 주소를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기대했던 운전기사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길을 잃으면 전화 한 통화로 어디든 데리러 가겠다는 하숙집 안주인의 말과는 달리 공중전화기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서 내 최신 스마트폰이 전혀 안 터진다는 것을 안 순간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서 마치 무인도에 고립된 기분이었다.


 그 당시 케이블이 안정적으로 공급 안 된 그 지역에서 최신휴대전화는 있으나 마나였다. 집이 비슷비슷하고 큰 관공서나 가게 같은 표지가 될 만한 곳도 전혀 없었다. 어제 집 근처를 요리조리 보았는데 기껏 한 일이라곤 하숙집과 주소가 적힌 명패를 카메라로 달랑 찍어놓은 것이 다였으니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대체 여기는 어디고 그 집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공공건물이나 상점이 혹시 보일까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허사였다. 여행이 아니어서 지도를 챙길 생각도 못 했고 스마트폰이 불통이니, 지도 한 장도 없이 동서남북 개념도 없이 그 나이에 대학 교육받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가장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했다. 왼쪽으로 한 참 쭉 걷다가 아무 곳도 찾지 못하면 다시 돌아와 오른쪽으로 다시 걸어 보는 한심한 짓을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똑같은 조그만 뜰에 비슷한 지붕을 한 집이 띄엄띄엄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았다. 그래도 체면이 있는지라 마당을 가로질러서 아무 집에나 뛰어들어 초인종을 누를 엄두를 못 내고 집 밖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집 밖에 나와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하염없이 남의 집 마당을 기웃대며 걸었다. 내 쪽을 휙 한 번 보고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원주민 남자 한 명을 목격했을 뿐 가도 가도 사람 한 명 보기 힘든 곳이었다.   



   

오클랜드 교외 지역 1월은 한국의 여름 날씨와 비슷했다. 낮에는 제법 더웠지만 오후가 되면 서늘해지고 저녁이면 가을날씨같았다. 어느덧 해가 지고 곧 별이 뜰 모양이었다. 이젠 염치 불구하고 아무 집에나 뛰어들어서 초인종을 누르고 나를 재워줄 수 있는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아니면 수심에 가득한 얼굴이어야 통할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방학 뒷바라지도 마다하고 워킹맘의 멋진 일탈을 꿈꾸며 신청한 영어권 국가의 국외연수 1개월은 기대와는 달리 도착 다음 날부터 고난의 시작이었다.     


그때 언뜻 멀리 할머니와 어린아이가 마당에 나와 있는 집이 보였다. 동양적인 할머니의 인자한 인상에서 갑자기 용기를 얻어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기회가 영영 안 생길 것 같은 절박함으로 그 집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Excuse me” 와 동시에 하숙집 주소가 적힌 쪽지를 할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이 주소가 있는 지역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할머니가 집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한 여인이 집 안에서 나와 내 쪽으로 걸어왔다. 한 눈에도 아랍 계통의 여인으로 보였는데,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린 20대 중반의 고운 얼굴이었다.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여인 말고는 아랍풍의 그녀의 외모를 설명할 길이 없는 내 좁은 시야를 탓해 본다. 현지인이 아니라 아랍 여인이 갑자기 나와서 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같은 여자라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그 할머니의 며느리인지 딸인지도 모를 그녀는 내 주소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그런 주소는 이 부근에서 들어 본 적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절망감으로 더욱 몸이 굳어졌지만, 그녀마저 놓치면 더는 대책이 없던 터라 그녀의 관대한 처분만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울타리 너머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가 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다시 나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입구 쪽에 차에 탑승한 건장한 체격의 아랍계 남자들 서너 명이 나타났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기분이랄까. 그들은 나를 한 번 훑어보더니 집안으로 사라졌다. 머리에 똬리처럼 덮어쓴 하얀 수건과 구릿빛 피부가 대조되어 그들의 얼굴색은 더 어두워 보였다.    

      

그 남자들을 보는 순간 그녀를 보았을 때와는 달리 얼음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나? 그녀 역시 키위남편을 둔 아랍계 여인이기를 바랐던 것인가? 911 테러 이후 세계인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그 지도자와 추종자들을 뉴스에서 많이 접해서 그런지 햇빛에 그은 얼굴에 구레나룻 하얀 셔츠의 다부진 체격의 고만고만한 나이의 남자들이 왜 이렇게 한 집에 여러 명 기거하는 것인지 나 자신에게 설명해 보려고 애써 봤지만 좋은 이야깃거리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들과 사위들이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집에 와 있는 거라고 안도하려고 애써 보았다. 차라리 도망갈까 생각해 봤지만, 어차피 동서남북이 허허벌판인데 달아나 봤자 붙잡히는 건 금방이었다. 대체 그들이 청바지 티셔츠 차림에 배낭 하나 달랑 멘 중년의 동양인 여성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겠냐고 두려운 마음을 애써 누르고 눌렀다. 그리고 여기는 이란도 이라크도 아닌 뉴질랜드라고 두려운 마음을 감추려 애썼다.           


5분을 한 시간처럼 기다리는 데 그녀가 혼자 한 순에 열쇠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나에게 집안에 세워진 작은 자동차에 타라고 하는 것 같은 몸짓을 보였다. 이건 또 뭔가? 그 남자들을 보는 순간 그녀는 믿어도 될까? 마음속에서 의혹이 생겼지만 일단 집안에 들어간 남자들이 따라 나오지 않기에 일단 그녀의 차에 올라탔다. 사실 다른 선택을 할 상황도 아니었다.


차에 타고 보니 그녀의 말인즉 본인의 차에 태워 줄 테니 내 눈에 익은 곳이 나타날 때 얘기해주면 거기에 차를 세워 주겠노라고 했다. 여기에 무슨 거절을 하겠는가. “Thank you”를 연발하며 고개를 연신 숙이고 그녀의 옆자리에 탔고 그녀에게 어학연수 온 한국인이라고 간단히 내 소개를 했다. 그리고 직업까지 말하고 싶지 않아 생략했다. 아무래도 국제적 망신인 듯하여. 그녀는 자신도 몇 년 전에 이민을 왔다고 하면서 연수 온 것치고는 영어를 잘한다고 나를 추켜세워 주었다. 본인도 영어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다고. 그녀와 같이 30분 이상은 그 지역을 돌았을 것이다.      


그래도 문제의 그 주소가 적힌 팻말은 보이지 않고 밤이 늦어지는 만큼 미안한 마음에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젠 깜깜한 밤이라 더 주변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차에는 우리나라에 그 당시 흔하게 볼 수 있던 내비게이션이 없었다. 최신휴대전화가 안 터지고 내비게이션 없는 차를 타고 낯선 곳을 다니게 된 난처한 상황은 내가 사는 나라에선 그 당시에도 흔치 않은 불운이다.


이제는 더 민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는 순찰 나온 경찰관의 차를 발견했다. 경찰차가 주차된 것을 본 그녀는 아마 저 사람이 당신과 같은 나라 사람인 듯하니 시원하게 물어보라고 하면서 차를 세웠다. 그 경찰관도 알고 보니 운전사와 같은 중국인이었다. 내가 얼마나 황당한 일을 겪고 있는지 그 경찰관을 붙들고 펑펑 울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 시원한 모국어로 소통은 못 했지만, 영어로 내 상황을 충분히 설명했더니 경찰관은 본인 차에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자신의 차를 따라오라고 했다. 내비게이션이 있다고 하니 귀가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아니 본인 차로 좀 태워주면 안 되나?” 연속적으로 이란 여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이제 내게는 오클랜드에 사는 천사가 되어 버린 친절한 그녀의 옆자리에 타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기는 했다. 경찰관이 내 하숙집으로 안내할 수 있다는 말을 듣자 그녀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따라가겠다고 했다.        

   

10여 분 후에 나의 하숙집과 같은 주소가 적힌 명패의 집에 도착했다. 분명히 아침에 나온 그 집이었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나를 내려 주고 그녀는 다행이라고 웃으며 바로 떠났다. 그날 그동안의 긴장이 풀린 탓인지 맥이 풀려서 그녀에게 감사 인사로 묵례만 했을 뿐 그 흔한 이메일 주소도 하나 받아두지 못했다. 누가 이 캄캄한 밤중까지 길 잃은 외국인 여성을 차에 태우고 집을 찾아 주겠는가? 그날의 불운한 사건을 하숙집 주인 부부에게 얘기했더니 요즘은 이민 온 중국 사람들이 버스를 운전하는 바람에 길도 잘 모른다는 투덜거리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왜 전화를 안 했느냐는 무심한 말과 함께...



연수를 떠나기 전부터 주변 교통을 체크하는 남자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왜 나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도 못 했던 것인가? 함께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연수원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홈스테이 하우스를 배정받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인적조차 드문 뉴질랜드의 교외로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기에 뜻하지 않은 그녀의 친절은 ‘뉴질랜드’가 아니라 ‘이란’이라는 나라를 오래 기억하게 했다.


그 후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도움을 청하는 외국인 여행자가 보이면 남의 일로 보이지가 않는다. "천사는 내가 좋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있다. 편견 때문에 아랍 남자들을 보자 마자 그녀의 집에서 도망가 버렸다면 아마 더 큰 위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하루 동안에 만난 많은 인종의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모두 영어를 구사하는 같은 뉴질랜드인이었지만, 낯선 땅에서 내가 그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들을 인종과 국가적인 배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필리핀 관광지에서 받은 호의를 생각하며 다소 나에게 뻣뻣하던 필리핀계 안주인에게는 국제결혼으로 성공한 이웃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고, 뉴질랜드인 남편과 아이들에게선 별로 아시아인에게 관심이 없는 백인들의 실상을 느꼈다.


뉴질랜드 원주민 남자는 난생 처음이었지만 집주인에게 들은 한 마디는 나에게 편견을 가지게 했다. 정부의 원주민지원정책으로 그저 아이만 여럿 낳으면 놀고먹어도 되는 게으른 사람으로 들어서인지 나를 흘깃거리던 원주민 남자에게 호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의 조상이 아시아에서 건너갔다는 역사적 고증을 들었음에도, 같은 아시아계라는 동질감은 커녕 나도 모르게 경계를 하고 있었다.   

  

한편 검은 머리의 경찰관과 운전기사가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최근 깊어진 두 나라 사이의 호감을 입증하듯이 막연히 그들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그들이 어떻게든 나를 도와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운전기사가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자 나는 무척 실망이 되어서 “왜 이래?” 하는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던 것.


 절박한 상황에 나타난 여러 명의 차에 탄 이란인 남자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911테러 이후 그리고 우리 나라 선교사를 무참하게 살해했던 특정 종교와 무리들에 대한 공포는 막연히 아랍 계통의 남자들에게 까닭 없이 두려움을 느끼는 정서를 가지게 되었나 보다. 그날 나를 태워주겠다고 한 사람이 이란 남자들이었다면 나는 분명 전속력으로 그 집을 도망 나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날 나를 만난 다양한 사람들은 나에게 편견이 없었을까?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남의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고 귀가 시간이 일정한 일본 하숙생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여주인은 이와 반대로 새벽에 술을 먹고 귀가하여 울타리를 넘어와서 뒷문을 고장 낸 적이 있는 예전 한국 하숙생의 흉을 보았다.  현재 하숙하는 한국 학생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지각으로 학교에서 주의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고 한국에 있는 부모와 전화로 크게 다투는 소리도 들은 적이 있다며 대체 공부나 따라가는지 걱정이라고 했다. 나는 당시 그 유학생이 안 된 마음에 가져간 고추장과 김을 식탁에 올려놓았는데, 먹어도 되냐고 나의 허락을 구하더니 바로 멋있게 김에 밥을 싸서 먹었다. 내 눈에는 매너 없는 학생이 아니었다.


그저 잔뜩 움츠리고 있을 뿐 그는 계속 낯선 땅에서 아직도 경계중인 듯 했다. 한국 음식을 맛보여 준다고 그 집에서 내가 불고기를 해 준 적이 있는데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눈물 날 정도였다. 그 학생의 말인즉 아침은 각자 해결이고 점심은 각자 자기 도시락을 준비하든가 학교에서 사 먹기여서, 형편이 좋지 않은 본인은 점심으로 물을 잔뜩 먹은 적도 있을 만큼 늘 배가 고파서 음식인심이 후한 다른 하숙집으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언제든 내 집 냉장고처럼 생각하라고 해서 냉동만두와 피자를 먹고 나서 그 집 아들에게 도둑취급을 받고 나서는 아예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손도 안 댄다고 했다. 그 나이에 배가 고프다니! 급식을 두 그릇이나 먹고 깔깔거리던 우리 학교 아이들이 생각나서 우울했다. 그 학생 역시 이 집주인에 대해서 또 다른 편견을 가지게 될 모양이었다.      


그날 나를 태워 준 이란 여인은 낯선 나라에서 정착하던 이방인의 설움을 나에게 투영한 듯싶다. 거기에 여자라는 동질감에서 나의 안전을 걱정해 주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작 나의 국적을 들었지만 나에게 아무런 부정적 편견이 없었다. 그랬다면 한밤중까지 처음 보는 나를 태우고 본인 역시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까지 차를 몰고 헤매진 않았을 터. 그런데 나는 그들의 나라와 종교에 대해 이런저런 간접경험으로 편견을 덧칠하고 있었다.


그날 나를 만난 중국인 버스 기사와 경찰관은 나로 인해 또 어떤 편견을 가졌을까? ‘대책 없는 길치 한국여자!’ 이런 편견을 가질까 무서워 나는 내 국적을 밝힐 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진짜 대책 없는 코리안이라는 편견을 가질까 두려워 더 이상의 소통을 포기하고 중국인 버스 기사의 차에서 내려 버렸다. 필리핀계 주인아주머니와 키위 남편이 가질 한국에 대한 편견이 두려워, 그날 밤 야무지게 교통편을 인터넷검색으로 알아보았고 버스 경유지를 모두 적어놓은 다음에 다시는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로 인해 한국 여자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인 편견까지 생기는 것이 싫어서였던 모양이다.    


 


      

그 후 기말고사가 끝나고 나면 효과적인 영어 청취학습의 핑계로 내가 영어 시간에 보여주는 영화에 목록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내 이름은 칸>에서 2001년 발생한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아스퍼거 증후군 무슬림인 주인공 '칸'이 겪은 편견으로 인한 비극의 현실을 제대로 만나게 된다.


<내 이름은 칸>


“I am not the terrorist!”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한 문장을 아이들이 기억한다면 편견의 무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므로….  그 것이 내가 받은 친절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되지는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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