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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느 Dec 29. 2020

샤이 소녀의 성장기

내 안의 빛나는 2%를 믿어 준 사람


최근에 재미있게 읽었던 Jenny Han의 <To all the boys I've loved before>에는 16살의 샤이 소녀가 등장한다. 존재감 없이 자기 세계 속에 빠져 사는 사춘기 소녀이다. 주인공 라라진은 십 대 시절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한 번 고백도 못 하고 대신 편지에 써서 모자 상자에 넣어두었던 그 마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소설 속의 라라 진은 언니의 러브레터를 몰래 훔쳐본 여동생이 그 편지를 직접 수신인에게 발송해 버리는 바람에 갑자기 우여곡절을 겪는다.


편지를 쓸 때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아껴두지 않는다. 나는 상대방이 절대로 읽어볼 일이 없을 것처럼, 그렇게 편지를 쓴다. 실제로 상대방은 못 읽어볼 것이기 때문이다. 나 혼자 생각했던 것들. 내가 찾아낸 그 아이의 특징들, 내 속에만 쌓아두었던 그 모든 것들을 나는 편지 한 통에 쏟아낸다. 그렇게 편지를 다 쓰고 나면 봉투에 넣고 입구를 봉한 다음, 겉면에 주소를 쓰고, 모자 상자에 넣어둔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제니 한/이지연 옮김




취학 전까지 나는 주로 엄마가 유일한 대화 상대였다. 엄마 옆에 앉아 아랫목 빨간 담요에 발을 묻고 엄마가 뜨고 있는 뜨개질 옷을 구경하든가 실을 감아주거나 풀어주는 일을 했다. 우리 가게에 손님이 오면 얼른 엄마가 뜨고 있던 그다음 단을 뜨고 엄마가 문을 닫고 들어오는 즉시 감쪽같이 내려놓는 민첩함을 발휘하기도 했다. 가끔 엄마를 찾아오는 친구분들이 서로 나누는 누구네 집 이야기와 세상 사는 이야기를 옆에서 조용히 듣곤 했다. 그 때 늦게 들어오시는 아버지의 밥 한 공기를 묻어 둔 아랫목의 빨간 담요는 따뜻한 겨울과 함께 떠오르는 기분좋은 추억조각이다. 우리 집 주위에는 유독 내 또래의 딸이 귀했나 보다. 오빠와 남동생은 이웃에 있는 다른 남자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러 가고 낮에는 늘 엄마와 안방에서 살았다. 종이인형도 그리고 만화책도 보고 혼자 소꿉놀이도 많이 했다.


그러던 중에 여자 친구가 한 명 생겼다. 그녀는 내 또래의 우리 옆 집 화장품 대리점 사장님의 딸이었는데, 어느 날 이사를 갔다. 그녀가 이사를 가고 내 방에서 머리가 아프도록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많이 울면 머리가 아프고 귀도 먹먹해진다. 방바닥에 몸을 구르면서 울었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부모로서는 난감한 일! 모처럼 생긴 친구가 가고 나면 나는 이제 소꿉놀이는 누구하고 해야 할지 그게 더 서러웠던 것이다. 그녀를 우연히 다시 만났던 것은 고등학교에서였다. 우리 둘 다 흔한 이름은 아니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명찰을 봤다가 단번에 서로 알아보았다. 어릴 때 얼굴이 그대로 있었다. 세월이 너무 흘러 다시 만나서 반갑긴 했으나 어린 시절 기억으로 다시 친해지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가로막혀 있었다.




빠른 2월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1년 일찍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늘 담임선생님 손을 잡고 다니려고 할 정도로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녔다. 담임 선생님을 따라 처음 클럽활동을 시작했던 것이 문예반이었다. 얼결에 따라가서 덕분에 맞춤법과 글쓰기도 배우고 책도 많이 읽었다. 그 당시 내 취향에는 딱이었을 것이다. 장난치는 남자아이들도 별로 없고 가만히 앉아 책 보고 글 쓰는 것이 좋았다. 2학년이 되어서 나의 절친이 된 P양-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심지어 대학까지 같은 과 동기가 된다-이 전학을 왔고 나와 달리 외향적인 그녀와 친해지면서 또 다른 친구들이 이어지고 고학년이 되자 6명의 친구 그룹을 만들게 된다. 무엇 때문인지 6총사라고 불렀다.


그 친구들은 작은 규모의 학교에서 나름 공부도 좀 하면서 학급에서 부반장 감투도 쓰고 나를 제외하고는 말발이 밀리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외향적인 친구들이 웅변대회에 나가면 그녀들의 웅변 원고도 도와주고 그녀들은 반대표로 마지못해 참가하게 된 내 웅변 제스처를 지도해 주기도 했다. 그 시절 공부를 핑계로 몇몇 친구들의 집에 놀러 가서 ‘무서워서 못 간다’고 허락을 받은 후에 파자마 파티도 했다. 가게를 지키느라고 나를 데리러 올 수 없었던 엄마는 부모들끼리 서로 아는 경우에는 마지못해 허락을 해 주시곤 했는데, 밤새 공부는 뒷전이고 밤늦도록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학교생활, 문학, 음악, 이성교제 등 우리의 관심사는 끝이 없었다. 그 들 중 누구와도 관계가 틀어지지 않도록 나는 무척 신경을 썼었나 보다. 혼자서도 각각의 친구들 집에 자주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들이 나를 빼고 다른 누구와 더 친해질까 두려웠던 것인가? 소위 그 안에서 왕따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사실 샤이 소녀였던 내가 이렇게 여러 명의 친구들이 생긴 것은 결국 교내 동아리 활동이었다. 걸스카우트 활동, 합창반, 악대부 활동을 하면서 친해졌다. 친구가 여럿이다 보니 내 취향에 맞는 친구가 있게 마련이었다. 문예반에선 S, 악대부에선 L, 학생회에선 J, 편안한 토크는 K, 공부할 때 죽이 잘 맞던 P 모두 아동기에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친구들이다. 같은 반이 되거나 교내 활동이 겹치면서 가끔 누구와 서로 더 친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비교적 서로 의좋게 지냈다. 반이 달랐기 때문에 우리가 모이면 동학년 소식은 다 접수되었다. 모두 함께 했던 걸스카우트 모임이 있는 날이면 단복을 빼 입고 원피스의 허리 벨트를 있는 대로 조이고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다. 그 당시에 걸스카우트 입단은 단복구입과 활동비 때문에 가계에 조금은 부담이 되었다. 우리 반에는 중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수학여행을 가면 본인은 수학여행을 못 가는 친구들도 꽤 있었던 걸 보면 자영업을 하던 아버지가 열심히 살아 주신 덕분에 많은 것을 누렸다.


그 당시 친구들 거의가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나도 교회를 다니게 된다. 내게 종교기관은 샤이 소녀의 좁은 세상을 확장하는 데 큰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교회에 가서도 나는 여전히 앞에 나서지 않고 묵묵히 친구들을 따라다녔지만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사교장이기도 했다. 친구들을 따라서 주일학교와 여름 캠프, 크리스마스 성가대도 따라다녔다. 성당에서 어렸을 때 아끼던 신발을 잃어버렸다던 아버지는 종교활동을 별로 탐탁지 않았는데 그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불건전한 이성교제와 관련된 문제가 종종 교회나 성당에 다니던 아이들의 개인적인 모임에서 종종 터지곤 했다.


연애가 뭐 죄인가? 지금은 의아스럽지만 그때는 이성교제의 선이 분명했다. 공공연히 손이라도 학교 주위에서 잡고 다니면 좋은 이야기를 듣기는 어려웠다. 깻잎머리를 한 교복 유니폼을 몸에 딱 맞게 입은 언니들은 학교 건물 뒤에서 가끔 모자를 삐딱하게 쓴 교복 단추를 풀어헤친 오빠들과 어울렸고 우리는 그들을 피해 다니곤 했다. 오빠 역시 교회를 다니는 나에게 좋은 소리는 안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세례를 받고 모태신앙 교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학생회 모임 회장으로 앞에 나가서 기도를 하던 핸섬한 교회 오빠는 당연 우리의 우상이기도 했다. 눈을 살며시 뜨고 어쩌면 저렇게 낭랑한 목소리로 멋진 기도문을 종이도 안 보고 외울 수 있는지 감탄하곤 했다.




소녀들의 그룹에서 빠질 수 없는 관심사는 단연 로맨스였다. 나처럼 70~80년대에 십 대 시절을 보낸 샤이 소녀라면 마음을 흔들었던 남자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아끼는 책 속에 고이 모셔 두거나 서랍 속에 깊이 숨기곤 했다. 단 한 번 이 철칙을 어겨서 한 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는 했다. 앞에서 언급한 이 여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파자마 파티를 하면서 각자 좋아하는 남학생 이름을 고백한 적이 있다. 평소 발랄하고 명랑하며 고백 따위 두렵지 않은 용감한 친구들이 먼저 입을 열게 되고 순진한 아이들은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이름을 내뱉게 되는 것이다. 나도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문득 생각 난 옆 반에 있는 핸섬한 소년의 이름을 대게 되었다. 이런 경우 듣기만 하고 고백하지 않으면 아주 의리가 없는 사람이 된다.


다음날 아침에 학교에 갔더니 이게 웬 걸. 그토록 맹세를 하던 아이들 중에 누가 먼저 이야기를 했는지 우리들의 좋아하는 남자아이에 관한 진실은 완전 동학년에 소문이 쫙 퍼졌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이 좋아하던 남자아이들은 여러 명이 동시에 좋아하다 보니 인기남으로 묻혔는데 일대일 매치가 된 나는 한동안 그 아이만 보면 피해 다녔다. 정작 나는 그렇게 심각한 짝사랑도 아니었고 더구나 고백할 생각은 일도 없는데, 친구들이 가서 "~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동학년에 5개 정도의 학급인 작은 학교였다. 우리 반 옆 교실의 문제의 그 아이를 복도에서 우연히 볼 때마다 피하느라고 한동안 화장실도 못 갔다. 아마 그 애도 나를 피해 다녔는지 모른다.


중 3 때 집에서 떨어진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면서 우연히 그 아이와 또 다른 친구와 같이 집으로 가게 되었다. 매너 있게 그 아이는 “너네 집이 여기지” 하면서 나를 먼저 바래다주었다. “이런, 얘는 우리 집을 어떻게 아는 거야?” 문구점을 했던 우리 집에 그 아이도 학용품 사러 왔을 수도 있지. 나는 왠지 부끄러워서 후다닥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들 금방 잊어버렸을 텐데 혼자서 그 해프닝으로 한동안 그 아이를 피해 다녔을 정도로 나는 부끄럼쟁이였다. 그 후 느끼게 된 것은 나를 포함해서 못 믿을게 여자 친구들의 입이란 것. 나 역시 절친에게 “이 거, 너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면 절대 안 돼. 너만 알아야 돼.” 그러면서 누군가의 비밀 이야기를 하곤 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현실의 연애는 소심한 나에겐 안 맞는 것 같아서 그 대신 다른 곳에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만의 공간에서 책을 읽고 그 책의 주인공에게 가끔 편지를 쓰곤 했다. 주인공 역시 남자는 제외 여자 주인공으로만 통일했으니 어찌나 소심했는지~~ 심지어 일기장에도 고백을 못 했다. 아마 식구들 중에 누군가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했나 보다. 정작 내가 공부할 때 은근 의식도 하고 관심을 가졌던 남자아이는 우리 반 1학기 반장이었던 L 군이었다. 키는 그 당시에도 그다지 크진 않았지만 야무지고 똘똘한 아이였고 배짱도 있었던 것 같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퀴즈를 내면 그 아이와 다투어가며 문제를 맞히려고 했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유행하던 짤짤이를 집중 단속하던 시절 반장이 짤짤이를 했다고 담임선생님에게 엄청 혼이 나고 그 아이는 2학기에 반장에서 밀렸다. 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미혼에 핸섬했지만 다소 다혈질인 분이라 한 번 화가 나시면 숨겨둔 굵은 막대를 꺼내서 호되게 혼내시곤 했다. 울어도 소용없었다. 돈 놓고 돈 먹는 도박성 게임이라 지도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내 어린 마음에 매도 맞고 갑자기 반장을 그만두게 된 L군이 가엾다고 생각되었고 그 후에 그 아이는 기가 좀 죽은 것 같았다. 그래도 선생님을 찾아뵙고 지금도 반창회를 주도하는 그 아이는 대인배임에 틀림없다.




2학기에는 얌전하고 선생님 눈에 든 또 다른 L군이 반장이 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한 번은 엄마와 같이 우리 가게에 뭔가를 사러 왔는데 나도 부끄럼쟁이였지만 그 아이도 나 못지않은 부끄럼쟁이였던 듯. 얼굴을 엄마 등 뒤에 감추고 아무 말도 안 하더라나. 그래서 나도 사춘기가 되어서는 아는 남자아이들을 손님으로 맞이하는 게 싫어서 부모님 대신에 가게를 보는 게 싫었다. 한동안 공부하느라고 바쁜 척을 했다. 후에 대학에 입학한 후 이제는 샤이 소녀티를 완전히 벗은 내가 중학교 동문들이 모이는 계모임이 생겨서 참석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중학교 출신이었지만 실제로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다른 건물을 사용하고 합반이 아니어서 서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조회시간이 다였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아이들은 대부분 인근의 중학교에 입학을 했고 그 학교에는 부근의 몇 개 초등학교에서 합쳐 정원을 채웠다. 그런 이유로 나와 다른 학교를 나온 생전 처음 보는 중학교 동문이 나에게 2학기 반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내 이름을 누군가에게  많이 들어보았다는 것이다. 사연인 즉 L군이 나를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했다.  아이도 나 못지않은 샤이 소년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왜 그 아이가 그때 부끄럼을 탔는지 뒤늦게 이해하게 되었다.  참 나! 한번이라도 얘기를 했어야지. 뒤늦은 관심은 쑥스럽기만 했다. 진작 고백해 주었다면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주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자신이 가장 빛나는 시절에 고백을 했어야 했다. 그래야 성공의 확률이 높은 법이니까. 이상형도 나이에 따라 변하는 법이다.




중학교에 가서도 나는 별반 크게 외향적인 아이는 아니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진학은 졸업 성적에 따라서 인문계나 실업계를 진학했는데 시내에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간혹 실력 있고 집안이 조금 어려운 아이들은 취업이 잘 되는 ~여상에 지원하기도 했다. 운 좋게 상위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여세를 몰아 사대에 다니던 동네 언니에게 친구와 함께 영수 과외를 두어 달 받았는데 정부에서 과외 금지령을 내린 후에 그나마 그만두게 된다. 지금과 달리 학업에 대한 부담이 엄청났던 학창 시절이었던 것 같다. 매일 아침마다 보던 일일 고사도 있고 매 달 보는 모의고사도 있었다. 모의고사를 보고 나면 벽보가 붙는다. 남녀 합쳐서 등수가 매겨진다. 누구는 한숨을 쉬고 어떤 이는 어깨가 올라가는~~타고 난 재능보다는 꼼꼼한 노트필기와 시험 전 효율적인 공부로 나는 중학교 시절을 그럭저럭 버텼다.


중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교내 활동은 방학중 독서캠프! 독후감 노트를 준비하고 도서실에서 마음대로 책을 골라가며 읽고 리뷰를 남겼는데 진행하던 선생님이 글쓰기의 피드백을 주었다기보다 독서에 대한 열정을 응원해 주시던 분이었다. 집에는 세계명작 수십 권이 다였지만 독서캠프 덕분에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도서관 책을 대출하면 뒷면에 대출카드가 꽂혀 있어서 거기에 적힌 이 전 대출자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아는 사람의 이름을 발견하면 짜릿해진다.


헉! 도서관에 이런 책이 있나? 놀라면서 들추어 보면 다소 수위가 높은 대목은 여지없이 한 장 급하게 찢겨나가 있다. 그러면 이전 대출자의 이름을 나도 모르게 훑어보게 된다. 거기서 오빠의 이름을 발견한 순간 그 황당함이란! 물론 오빠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은 들지만. 가끔 내가 흠모하는 교내 인기남 오빠들의 이름이 거기 대출자 명단에 적혀 있을 때는 급 책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전통 한국소설에 왜 이렇게 그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지 이유를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물론 나는 책의 내용을 훑어보고 대출증에 내 이름이 적히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나도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는지라...




그렇게 남들이 안 보는 책까지 열심히 읽고 여름방학이 지난 후에, 어느 날 윤리 선생님이 수업을 대충 끝내시고 남은 시간에 3분 자유주제 말하기 시간을 가지겠다고 하셨다. 평소 윤리적인 이야기만 조용히 하시고 나가는 연세가 드신 근엄한 남선생님이었는데 왠지 잘못한 것 없이 주눅 드는 분이었다. 그 날 아마 피곤하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나를 지명할 게 뭐람. 정말 눈앞이 아득했다. 여학생들만 있는 교실이라 덜 창피하긴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 나는 여전히 두려운 샤이 소녀였다. 앞에만 나가면 왜 그리 떨리는지.. 친한 아이들과는 곧잘 수다를 떨면서도 여전히 교탁 앞은 무서웠다.


윤리점수가 높았었나?하필이면 나를? 이런 생각이 밀려 왔지만 그래도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나는 뭐든 해 보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웃기는 이야기도 못 하고 분위기 안 어울리는 노래를 한 곡 부를 수도 없겠고 떠오르는 것은 최근에 읽은 책이 다였다. 그 책은 O.Henry의 단편집이었는데  중에 하나인 ‘소피와 찬송가’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썩 괜찮은 구성의 단편이었다. 스토리를 잘 풀면 지루하지 않고 쓰릴이 있었다. 추운 겨울 교도소에서 겨울이라도 나고 싶었던 소피가 아무리 범법(?)을 저질러도 소원을 못 이루다가 이제는 포기하고 다른 인생을 살아 볼까 하던 순간 교도소에 직행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주제는 Such is life! (그 게 인생인거야?) 친구들은 추운 겨울 오갈 데 없는 소피가 언제 경찰에게 잡혀갈 수 있을까 가슴 졸이며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내 이야기에 내가 빠져들어 5분은 혼자 열심히 떠들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선생님은 의자에 앉아 미소를 짓고 계셨다. 누군가가 시작을 잘해야 되는데 시골 아이들이 내심 걱정이었던 그분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 한 자락을 펴는 내가 기분 좋으셨던 가 보다. 그 후에 30년 이상 교직에 몸담고 있던 내가 상상하는 선생님의 마음속 말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거다. “어라! 얘가 시키면 말을 잘하는 아이였네. 안 시키면 어쩔 뻔했어. “




매일 남의 말에 맞장구만 치다가 주인공이 된 기분은 특별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기가 두렵지 않게 된 것은 그때부터. 선생님이 크게 칭찬을 해 주셨고 친구들도 재미있다고 박수를 쳐 주었다. 샤이 소녀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은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나의 2%를 믿어 주었을 때 없던 용기가 갑자기 샘솟았다. 두려움이라는 친구를 멀리하는데 시간을 쓰지 말고 용기라는 새 친구를 초대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용기를 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것이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우연히 자리를 마련해 준 윤리 선생님이 감사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을 뿐이지. 나는 말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얌전하고 예의바르게 커 주기를 바란 주변의 기대도 있었지만 몇 번이나 외운 웅변 원고를 막상 대회 날이 되어 머리가 하얘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고 보니 그때부터 생겨난 두려움을 한 번에 떨치기 어려웠다. 남들의 시선이 무섭고 그들이 내 등 뒤에 할 이야기는 나쁜 쪽으로만 상상의 날개를 폈다. 그 날 이 한 번의 성취감은 그런 나를 다른 사람이 되게끔 해 주었다. 두려움에 집중하면 영영 말문을 트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믿어 준 사람에게 답해보자고 결심하고 ‘용기’를 내는 순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눈부시게 빨리 뇌가 찾기 시작했고 나는 내가 가장 많이 해 왔던 독후감을 글로 쓰는 대신 입 밖으로 뱉었다.


그 후 ‘나의 빛나는 2%'를 믿어   선생님 덕분에 나는 ‘샤이 소녀’를 벗고 조금 더 당당하게 살게 되었다. 당연히 그 날 이후 삶의 질은 높아졌다. 결국 샤이소녀를 탈피한 덕에 나는 꽤 괜찮아 보이는 샤이한 남자에게 프로포즈하는 법까지 알려주고 그와 결혼에 성공한다. 세상에는 중요한 순간 결정력이 부족한 샤이한 남자들도 꽤 많았다. 여전히 샤이한 여자로 살았다면 나는 많은 소중한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부딪쳐서 좀 망가지더라도 뭔가 실행해보는 인생에는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대학 졸업 후에 교사가 된 후 늘 누군가의 '빛나는 2%를 믿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로는 몇 장을 쓸 수 있는 재능있는 아이들이 막상 앞에 나가면 말을 못 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그 애들이 더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기다리고 박수 응원을 하면서 그들의 작은 성취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샤이 소녀나 소년으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바닥을 쳐다보고 있거나 멀리 천정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는 그들의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가득 차 있는지 알아보지 못한다.


다소 어눌하고 기어들어가는 그들의 부끄러움에만 집중할 뿐이다. 말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세계가 결코 좁은 것이 아니다. 말하는 일에 성과를 내기보다는 실패의 경험을 누적했을 뿐이다. 작은 성과가 모이면 성공의 경험이 된다. 아나이스 닌에 의하면 ‘인생은 용기의 양에 따라 줄어들거나 늘어난다’고 한다. 우리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살다 보면 우연히 누군가의 용기에 작은 힘을 보태어 줄 수 있다. 그 작은 성과 딱 한 번을 도와주면 얼마든지 그들이 인생도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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