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되돌아가면 돼! 그렇게 마음 한 번 먹고 나니 그 다음엔 모든게 편안해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저와 함께 1일 1 그림을 시작하지 않으시겠어요?’
예쁜 그림을 매일 블로그에 업데이트하던 이웃이 있었다. 매일 가서 하트를 누르고 구경을 하는데 어느 날인가 이런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그림을? 그림 그린 지가 언제인데 이제 종이와 물감을 손에 쥔다고 그림을 그릴 수는 있으려나' 그 메시지를 처음 보고 느낀 생각이다.
그림을 그리기엔 내가 너무 나이 먹은 사람이라는 편견도 작용했다. 그 후에 아는 인친님의 피드에서 손그림을 발견했다. 아마 그녀의 제안에 흔쾌히 도전을 결심하신듯. 그분 역시 학창 시절에도 그림에는 소질 없었음을 밝히면서 소소한 서툰 그림을 즐기고 있었다. “저 정도라면 나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게 되었다. 학창 시절엔 그래도 주위에 친구들의 그림을 대신 그려주기도 했으니 혹시 알아? 재미날지도...
그렇게 그다음 달에 1일 1 그림을 시작하고 2개월 동안 손그림을 매일 인증했다. 의외로 기분이 괜찮았다.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청소까지 한 다음 오전 10시쯤에 그림을 그렸다. 색연필 몇 자루를 아이들 책상 서랍에서 찾아와서 무지 공책까지 하나 주워다가 어설픈 손그림을 시작했다. 딸아이가 사놓은 일러스트 책을 가져와서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가 디지털 그림에 눈을 떴다.
그림을 그리려고 해 보니 수채화, 유화, 크레파스, 색연필... 다양한 그림도구가 각각 다른 효과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재료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 디지털 드로잉. 게다가 브러시의 종류와 기능이 무궁무진했다. 그림을 업로드하는 것은 빛의 속도! 복사와 저장, 활용도는 감탄할 정도였다.
당시 내 아이패드는 아이패드의 조상쯤 되는 초기 모델이어서 애플 펜슬을 산다 해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대체 어디에 그리는 건가? 알아보니 그들은 그리기 앱을 다운로드하여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메디방이니, 프로 크리에이트 앱이니 그런 낯선 이름을 적어두었다가 다운로드하여 보았다. 휴대폰에서 그들의 그림을 흉내라도 내 보려 했는데 글자나 써 볼까 무딘 펜슬로는 선이 잘 안 그어졌다.
아이패드의 사양과 비용을 두고 끝없이 고민하던 어느 날 큰 맘 먹고 쿠팡 새벽배송으로 최신 고스펙 아이패드를 구입하게 된다. 역시 실행 결정은 감성이 충만한 한밤중이다! 남편은 고가의 물건을 구입해서 던져 놓을까 걱정되었는지 소극적인 협조만 했다. 당신 돈으로 사라는 것! 까짓것~~ 나한테 이 정도 선물도 못해! 평생 자식들 뒷받침만 했는데 나도 이 정도 쓸 자격 있다고!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그야말로 앱을 다운로드하여도 애플 펜슬을 제대로 충전하는 법도 몰랐던 내가 혼자서 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야심 차게 두툼한 책을 한 권 샀는데 어찌나 설명이 많은지 그 설명을 다 이해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렇게 해서 디지털 드로잉 입문은 온라인 강좌를 구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강사의 피드백이 바로 오는 강의에 같은 커뮤니티에서 얼굴을 익힌 분이어서 물어보기도 쉬울 듯했다. 프로 크리에이트 앱의 환경을 익히는 것은 왜 그리 더딘지... 알아두어야 할 건 많고 강의 되감기를 하면서 겨우 겨우 미션을 하나씩 따라갔다.
그중에 가장 부끄러운 것은 아이패드 펜슬의 정확한 충전 지점이 어딘지 잘 몰랐다는 것과 충전여부를 어떻게 확인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갑자기 펜슬에서 잉크가 나오지 않으면 어쩔 줄 모르고 답답했다는 것. 펜슬 사용만되도록 환경설정에서 세팅해 두면 손이 닿은 얼룩이 생기지 않는다 는 것도 몰랐다. 완성된 그림에 얼룩이 생긴 것을 두고 속상해서 쩔쩔매기도 했다. 손을 대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종이에 그림 그리기보다 더 힘이들었다.
그리다 보면 왼쪽에 있는 채도의 버튼 높낮이가 내 손에 닿아 0으로 바뀌었고 갑자기 펜슬의 잉크가 먹통이었다. 몇 시간 동안 애플 펜슬만 충전시키다가 제 풀에 화가 나서 며칠 동안 쉬었다. 주위엔 나보다 더 디지털 문명에 깜깜인지라 물어볼 사람도 없고 알만한 사람에게는 무지함을 들킬세라 혼자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강사가 미리 제공하는 브러시와 색상표도 볼 줄 몰랐기 때문에 주는 혜택도 제대로 못 누리고 색상 고르기부터 벽이었다. 아마 오프라인이면 금방 몇 초만에 문제를 찾고 강사의 도움을 받았을 텐데... 너무 기본적인 질문이라 처음에는 부끄러운 나머지 채팅창에 질문할 용기도 못 냈다.
그렇게 겨우 따라가고 있었는데 자신 없는 수채화 그리기 미션에서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따라가 볼래도 수채화의 느낌을 제대로 살려 명암을 넣는 게 어려워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처음 들었다. 딸내미 말처럼 이건 학원에 가서 배워야 하는 것인가? 성인 취미미술학원 같은 교습소에 가서... 아니면 문화센터라도...
코로나의 거리두기가 내게 그런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수채화 그리기 미션에서 막힌 나는 또 다른 수채화 강좌를 등록하는 것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 작은 붓을 들고 직접 형태를 딴 손그림에 가볍게 채색을 하는 여행스케치 강좌였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눈에 보이는 '종이'에 실제 펜과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는 분야였다. 쉬운 그림은 아니었지만 마치 큰 짐을 덜어낸 것처럼 가볍게 미션을 수행할 수 있었다.
수채화 미션을 중간쯤 격파하고 나니 이제야 다시 ’ 디지털 드로잉의 세계‘로 돌아가 볼 마음이 생겼다. 앞으로 두어 달 후면 마감이 될 강좌였지만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영원히 디지털 드로잉의 세계 입문은 못 할 것 같았다. 마치 어릴 때 엄마를 따라간 목욕탕 물에 빠져서 몇 번이나 물을 들이킨 다음에 내가 수영을 끝내 배우지 못하게 된 것처럼.
아~~ 그런데 돌아가려고 하니 이젠 그 프로 크리에이트 앱의 환경이 너무 낯설었다. 정신없이 따라가서인지 뭐가 뭔지 기억도 안 났다. 결국 능동적인 자기 주도 학습의 과정인 '되감기'에 들어갔다. 전에 사 둔 디지털 드로잉 벽돌책을 다시 펼쳐서 하나씩 꼼꼼히 확인을 했고 필요하면 검색을 통해서 관련 정보를 확인했다.
강의 종료일도 얼마 안 남았기에 이제는 체면을 내려놓고 강사에게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부었다. 친절한 그녀는 인스타그램의 DM으로도 내 질문을 받아주기도 했다. 때로는 강사의 말도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강의를 되짚어가 보았다. 그러면 신통하게도 어느 시점에서 나의 오류를 찾을 수 있었다. 새로운 날이 밝기 전에 오류를 찾아 미션을 하나씩 해결할 수 있었다. 느려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어떻게든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애니메이션 효과 활용하기가 가장 어려운 과정이었다.
디지털 드로잉의 미션이 모두 끝났을 때 얼마나 후련하던지... 취미미술 강좌를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완강해 내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고 강사는 귀띔해 주었다.
그렇게 '되돌아가기'를 많이 해 본 덕분에 이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도 조금씩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되감기의 기술에는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있다. 그 건 인내를 발휘하는 '시간'이라는 여유다. 되감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바로 나 자신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 이 세상에서 내 말을 가장 잘 들어주는 내 손과 머리가 잘 협업할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즈음 나는 바디 앤 마인드 리셋을 한다고 매일 아침 명상 스트레칭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상쾌한 아침의 스트레칭 10분이 되면 마지막에 나오는 멘트는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오늘 하루 이루고 싶은 딱 한 가지만 생각해 보십시오"였다.
이 마법 같은 주문에 따라서 숨을 깊이 들이 마시고 난 후에 나는 단 한 가지 소원만 빌었다.
"오늘의 손그림을 완성하고 자게 해 주세요.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요."
마치 책가방을 처음 멘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레는 새로운 배움에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 벌여 놓은 취미생활과 독서와 운동, 차곡차곡 쌓이는 집안일에 쫓겨서 우왕좌왕하느라고 그 어디에도 찬찬이 마음을 온전하게 주지 못하다가 괜히 나의 재주 없음만 탓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프로크리에이트앱을 배우고 나서 달라진 것은 이제 내가 디자인한 그림을 취미계정인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리고 있다는 것. 어제부로 손그림 100일 도전의 82호를 찍었다. 디지털 드로잉 강의의 모든 미션을 완수하고 나서 그 두툼한 디지털 드로잉 책을 제법 이해해 가면서 예제를 응용한 내 그림을 그리는 중이다.
누군가는 그림을 빌려 쓰겠다고 하고 내가 그린 캐릭터의 남자 주인공도 그려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저작권 걱정 없이 내 그림을 저장해 두었다가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도서 협찬을 받으면 북리뷰를 쓰고 마음에 드는 책은 내 그림 속에 넣어준다. 표지가 마음에 안 들면 다르게 그려 주기도 한다. 모델료 걱정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인물을 그리고 의상을 결정하고 메이크업을 해 보는 것도 깨알 재미 중의 하나이다. 예쁜 메모판을 그리고 아이패드에서 그림 불러오기를 한 다음 나만의 다이어리 템플릿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저작권 걱정 없이 그림을 마음대로 활용하고 싶은 분들과 똥 손을 탈출하고 싶은 분들에게 디지털 드로잉을 권하고 싶다. 종이 찢어질 걱정 없이 얼마든지 지우고 다시 그려도 된다!마음만 먹으면 대리석 타일을 깔고 잉크를 가죽이나 나무질감으로 바꾸고 하늘에서 펑펑 눈이 내리다가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게 만들수도 있다.
얼마 전부터는 소설 속 캐릭터를 그려보기 시작했다. 내가 느낀 소설 속의 인물을 그려보다가 요즘은 인물화 입문을 시작했다. 포토샵에 그림 좀 그린다고 나를 무시하던 미대 나온 딸! 딱 기다려! 나도 한 수 가르쳐 줄 테니까!이건 가끔 내 그림을 흘깃거리는 딸아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명암 넣는 법을 가르쳐 달랬더니 딴엔 바빴는지 왕초보 유튜브를 찾아서 배우라고 하던가!수준보다 높은 걸 기대한다는 말인 듯. 우리가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했던 거지. 능력이 못 미쳐서는 아니라고 말해 줄 날도 머지 않았다. 자기주도학습능력이 미래세대의 무기라면 나도 너못지 않아!
번아웃이 와서 쉬어가더라도 언젠가 다시 일어나야 한다. 그럴 때 <되감기>와 <단 하나의 선택>의 힘은 기대 이상이다.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지만 노력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나를 지치지 않게 할 수 있는 기술을 발휘할 수 있어야 더 오래 더 멀리 갈 수 있다. 앞으로 가지 않으면 뒤로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