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아니다. 지쳐서 침대 위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이래저래 설명하기가 귀찮아 재택 하는 남편에게 저녁을 부탁했다. 처음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집콕한 후로 전업주부의 역할을 자처한 내가 밥을 안 하고 시켜 먹자는 꼼수는 부렸을 망정 이렇게 끼니를 내려놓아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남편은 흔쾌히 승낙을 하고 나서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벌렁 누워 있는 나를 흘깃 보고 갔기 때문에 대충 짐작을 했을 것이다. 감기몸살이 아니냐고 물었다.
"아냐!"
"혹시 그 아로마 램프인가 이상한 오일 때문에 그런 거 아냐? 그 거 끄라니까?"
"아! 이건 아니라고!"
실은 오늘 아침부터 오일병 하나 비틀 힘도 없게 손에 맥이 풀린 건 바로 요 거 때문이다.
말하긴 쑥스럽지만 그림 때문이다. '인물화'
아마 밤에 이 글을 읽으신 분이라면 깜짝 놀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인물화를 그려 보겠다고 강의를 신청했을 때 기초과정의 여러 페이지에 계속 등장하는 이 해골 그림에 나 역시 소스라쳤으니까! 내가 무슨 생물 실습을 신청했나? 아니다.
알고 보니 이해는 갔다. 얼굴에 있는 인체의 구조를 알지 못하면 자연스러운 얼굴의 비례에 맞춘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날부터 자를 가지고 눈과 귀, 코의 거리를 재면서 얼굴 윤곽을 그렸다.
눈썹을 그리게 되니 이제야 해골을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제야 미대에 다니던 딸이 자기 얼굴의 비례가 영 아니라고 불평을 해 대던 것이 일리 있음을 알았다. 이런 걸 알고 비례를 분석하고 그림을 그리니 제 얼굴에 어찌 자를 들이대지 않았겠나? 이런 걸 미리 알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싶다. 알면 성형외과 의사하고 마음이 잘 통해서 몇 군데 손 보았겠지.
눈썹 하나 그리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런데 그 눈썹의 산과 높이, 끝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총명해 보이는 눈, 우울해 보이는 눈,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는 눈도 된다. 서양 사람과 동양 사람의 눈의 구조가 어떻게 다르며 눈동자의 방향과 속쌍꺼풀의 분위기에 따라서 같은 사람도 다양한 표정을 가지게 된다. 콧대는 선을 그리는 게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그림자로 콧대가 보이는 것일뿐~ 콧대를 세우고 싶다면 음영을 표현해야 된다.
눈물만 흘린다고 슬픈 여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데도 무척 슬픈 눈이 있다.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눈동자와 눈썹에 따라서 왼쪽처럼 금방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이 되었다가 무슨 대답이나 척척 할 것처럼 총기를 머금은 눈도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 건 내 표현 능력의 문제니까 죄송할 따름!
<눈 표정 그리기>
눈에 이어 코, 입, 머리카락 등 배워야 할 것은 한참 남았는데 또 도전의식이 발동했다. 그럼 이렇게 인물화를 한 번 그려 보면 어떻게 되는 건가? 해골에 계속 눈 그리기에 싫증 나서 내가 그리던 1일 1 그림에 과감하게 요즘 배운 이 눈을 한 번 그려보기로 했다. 아직 제대로 배우지 못한 코와 입은 대충 얼버무려 보기로 하고...
오전 6시! 평소에는 책을 볼 시간인데 아이패드를 꺼내서 요즘 내가 그리고 있는 1일 1그림의 '캐릭터 그리기'에 들어갔다. 소재는 내가 가장 애정 하는 <빨간 머리 앤>의 주인공 <앤과 길버트>이다. 좀 더 그림을 잘 그리게 되면 그려 보려고 아껴 둔 소재인데 왠지 Feel이 며칠 전부터 왔다. 모든 과정은 의미가 있다는 결론 아래 들이대 보기로 했다.
이 장면은 요즘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이 아니라 수년 전에 방영했던 캐나다 TV 미니시리즈의 한 장면이다. 앤이 어엿한 교사가 되어 길버트의 구혼을 받아들여 사랑을 이루는 장면인데 이 둘의 표정이 참 보기 좋았다. 무엇보다 20대 처녀의 발랄한 얼굴과 그윽한 눈빛의 길버트를 그려 주어야 할 텐데!
결과적으로 9시가 넘어서야 겨우 내가 원하는 의상까지 맞춰주고 나는 정말 다운되어 버렸다. 세상에 얼굴이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약간 귀여운 듯하면서 발랄한 코가 맞는 거야? 그윽한지 걱정하는 건지?
얼굴 그리기에 장장 2시간을 바쳤을 것이다. 레이어를 겹겹이 쌓았다. 브러시를 다르게 채색해서 비교도 해 보고. 어설프게 배워서 절대 얼굴에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시작한 그림을 그만 두고 싶지가 않아서 딱 현재의 내 수준에서 끝냈다. 남은 한 시간은 칙칙한 배우들의 옷을 과감히 버리고 시대적인 나의 패션 상식과 감각으로 마무리~~
그리다 보니 이건 옷이 아니라 섬유를 직접 짜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런 디테일이 그림의 완성도를 높여 준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얼굴 묘사가 부족하니 옷이라도 ~~
그러고 나서 아침부터 뻗었다.
스트레칭, 명상, 만보걷기 다 엎어졌다.
정말 예술가들은 존경스럽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그렇게 빨리 얼굴을 그려주던 분들이 이리 대단한 분들이었다!
인물화는 그림의 끝판왕 같다. 대충 그려가지고 조화가 절대로 안 된다. 눈, 코, 입의 세밀한 묘사며 얼굴의 명암까지~~ 초상화 그리는 분들을 참 허술하게도 보았네. 아무나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여기에 전신 움직임에 손 발의 디테일까지. 절대 기웃거려선 안될 곳을 넘겨 본 건 아닐까?
내가 배운 과정은 종이에 연필로 그리는 인물화였지만 아이패드에서는 찰필이나 면봉으로 섬세한 눈두덩이를 표현할 방법을 잘 모르겠다. 고수들은 스킬을 알고 있겠지. 배움의 계단을 또 넘어야 한다는 거지.
옛말에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했던가! 다 큰 아이들 책상 서랍 속에 있는 색연필 몇 자루 가지고 색칠하기나 손그림 그려보려고 하다가 아이패드 드로잉에서 수채화로 이젠 인물화의 늪에 빠져 있다. 내가 책을 쓰게 된다면 내가 쓸 책의 일러스트는 내가 그려 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로 시작한 내 손그림은 이렇게 진행 중이다. 왜 열심히 하게 되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내일 지구에서 내릴지도 모르니 하고 싶은 거 하다가 미련 없이 가고 싶다는 거지. 그게 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