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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융이 Mar 10. 2018

그저 글

백수가 되었다

2017년 어느 날의 글


회사를 그만두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만두었다는 말은 부적합하다. 대표였기 때문에 대표에서 해임되었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10년간 눈 뜨면 회사에 가서 눈 감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던 생활을 했는데, 갑작스레 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되니 삶에 여러 변화가 생긴다. 이를테면 공식적 백수가 된 것인데, 남는 게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여유를 통해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맞벌이 부모님 아래 자라온 어린 시절, 학원을 다니지도 않고 TV 조차 나오지 않던 낮 시간에 할 일이 무척 없었다. 딱히 가지고 놀 장난감도 없던 터라 그냥 남는 시간을 어찌어찌 보내는 것이 하루하루의 일과였다. 그런데 시간이 많다 보니 할 수 있는 일들이 주로 생각하기, 그리고 또 생각하기였다. 생각하는 날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남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작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름의 즐거움으로 하루를 채우고 그다음 날을 기약하고 했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혼자서 있는 시간이 무척 좋았다.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는 그 시간의 고요함이 주는 묘한 안식에 작은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새 훌쩍 자라 내 안에 있던 생각을 틔울 여력조차 없는 ‘어른’이 되고, 회사를 대표하고 모든 짐을 떠안아 삶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시기를 보냈다. 나름의 의미도 있었고, 얻은 것도 많은 소중한 시간이었지만, 또 매일의 불안감에 잠 못 이루는 날들이긴 했다. 지금도 행아웃의 ‘띠링’ 소리, 문자, 메일의 알람이 들릴 때면 나도 모르게 내려앉는 가슴을 움켜쥐게 된다. 대표에게 급히 오는 연락 중에 좋은 일들이란 과연 있을까?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소소한 글쓰기들에 도전해본다. 탈고를 마친 논문을 여러 번 읽어보고, 연재 중인 칼럼을 들여다 보고,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도 배워본다. 건조하고 이성적인 글들에 익숙한 내게 감각적 글쓰기는 참으로 어려운 숙제다. 문득 돌이켜보니, 나의 글들은 온통 명사와 동사로 이루어져 있더라. 어떤 단어들이 있는지 조차 잘 모르는 형용사로 문장을 채우려고 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만 그 두통이 기분 좋은 통점을 자극한다는 것이 동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때로는 쓰지 않은 근육의 단련이 전에 모르던 감각을 일깨운다. 마치 처음 먹어보는 낯선 음식의 맛에 빠져드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글쓰기를 시작해보련다. 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글, 누군가의 의뢰로 이루어졌던 목적 있는 글이 아닌,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한 칼럼이 아닌, 힘도 빼고 원하는 바도 없고 읽어줄 이 없어도 무관한 그런, 그저 글. 어쩌면 나를 위한 글. 나의 삶에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과 함께, 나도 전에 없던 일을 하나 그냥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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