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던 짓을 하는 건 늘 힘들다
2017년 어느 날의 글
기분 좋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스트레스가 기분이 좋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솔직한 심정은 무척 불쾌하고 불편했었다. 그런데 또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것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것이 삶에 하나의 자극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활어가 되어 살아남기 위한 끈질긴 파닥 거림의 경험이라고나 할까.
그러고 보니 어제는 문득 나 자신이 도마 위에 활어가 된 듯 여겨졌다. 하나하나 포를 뜨듯 헤집어짐을 당했으니 말이다. 새로운 장르의 글쓰기에 도전 중인데 이건 비교하자면 대중가수가 킅래식 오페라의 창법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어렵고 고통도 약간 있다. 생각해보지 않은 방식으로, 써보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일단 쉽지 않다.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정해진 룰 없이 쓰던 글이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일련의 과정에 맞춰 스텝을 밟아가는 것이 지리멸렬하다. 그런데 또 여기서 해내지 못하면 루저가 될 것 같다는 불안감도 있다.
감정 없이 그냥 지식과 정보만을 전달하던 내가 문학이라는 장르에 도전을 하려고 하니, 감정의 조절이라는 것을 어디까지 얼마나 해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감정을 모조리 빼라면 빼겠는데, 그건 또 문학이 아니잖아. 건조한 글만 쓰라면 자신이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또 수업 중에 듣기로는 감정어를 배제하라고 한다. 감정어를 배제하면서 또 감각적인데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 글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 것인가? 이걸 내가 과연 할 수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일었다.
대학생 때, 작문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글쓰기에 도전했던 나에게 교수님께서 피드백을 해주셨는데, “의정 학생은 글 자체의 테크닉은 흠잡을 데가 없는데,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아.”였다. 그리고 만년 2등의 설움을 한 학기 내내 겪었다. 장르를 바꾸어 글을 쓸 때마다 1등의 자리는 매번 바뀌었는데, 나는 고정된 자리에서 한 번도 변함없이 그대로 있었다. 일종의 벌이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눈 앞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건 말이다. ‘너의 자리는 거기, 그 자리야. 2등’
어른이 되면서 나에게 글쓰기란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렵지 않게 쓰이는 칼럼들과 내 의식의 흐름들은 미디어를 통해서 대중에게 배포가 되었고, 책으로 쓰였다. 그리고 다시 보아도 그런 내용이었구나 무감하게 읽히는 것들이다. 전혀 나 자신의 글이 창피해 숨겠다는 마음 따위는 일지 않는 그저 그런 무난한 글들이다. 그런데 문학은 쉽게 쓰이는 것 자체가 죄악인 듯하다. 사유 없이 쓰는 것에 대한 비난을 받는 것, 문학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하고 싶어 졌다.
생각을 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온 진을 다 빼어가면서 글을 쓰라고 하면 나는 쓸 수 있을까? 아니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쓰고 싶지 않을 것만 같다. 하고 싶던 것을 직업으로 갖고 고군분투하면 그 자체가 싫어지는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좀 될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일지 않는다. 다만, 지금 나는 시험 안에 있다. 내가 해낼 수 있는지 혹은 아닌지를 가늠하는 시간이다.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그래서 잠시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 여기는 중이다. 이 기분 좋은 스트레스가 오래되면? 당연 나는 더 이상 문학적 감성이 녹아있는 글 따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쓰는 글은 나 자신으로 하여금 글에 독을 부어 멀어지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잠시만 버텨보자. 그래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나는 지는 게임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두 달만 그렇게 붙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