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작은 책
이런 컨퍼런스가 있다며 펀딩 페이지를 카톡으로 받았던 게 아마 7월 초. 그때는 9월 1일이 이렇게 금방 올 줄 몰랐다. 그리고 봄부터 세워온 계획들에 앞서, 작은 책부터 만들게 될 줄도 몰랐다. 토요일 한낮 홍대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등 쓸모없는 깨달음과 함께 이미 지쳐 맨틀 정도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 같은 깊은 지하의 강연홀 맨 뒷자리에 앉아 급한대로 인스턴트 블랙커피를 투여했다. 이제 텀블러를 들고 다녀야 하지 않나 생각하면서. 뚜껑이 잘 닫히는 텀블러가 집에 있던가. 시간은 금방 갔다. 1세션만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 할부가 나가는 날이기 때문에 보란듯이 열심히 필기했지만, 그냥 필기였다.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집에 가서 펜슬 케미꽂이를 갈아끼워야겠다는 거. "사업은 숫자이고, 숫자이며..." 이거 무슨 계시같은 건가. 비슷한 얘기를 각기 다른 사람에게 며칠 째 듣는 거 같은데. 지상으로 올라오니 더웠다. 여름이 끝났다는 말을 너무 자주한 게 좀 무색해지는 더위였다.
책을 만드는 과정을 좋아한다는 말을 생각했다. 무엇인가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좋아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나도 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 일을 진행하는 것. 그 과정이 주는 고통도, 어려움도, 기쁨도, 즐거움도. 그 느낌 때문에 이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던 날도, 그 과정에서 동떨어져서 무엇이 만들어지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무서워 매일 악몽을 꾸던 날도 있었다. 우리의 작은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전부 즐겁지만은 않겠지. 그래도 그 과정의 모든 순간에 내가 있을테니, 이번에는 이거면 됐다.
숫자에 대해서라면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떤 숫자에 대해서는 영영 알지 못할테지만.
바빠지겠다.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 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