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능소화
“이름이 능소화라고? 그럴 리가 없어.” 여름철 담벼락에 늘어지듯 피어나는 다홍색의 우아한 꽃. 한 친구는 그 꽃은 절대 그런 이름 일리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꽃의 이름은 능소화였다. 엄청 사연이 있어 보이는 이름이지만 사연을 찾아보지는 않았다. 그저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을 뿐이다. 노랑부터 주황을 거쳐 다홍까지. 연두부터 초록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의 조합 앞에서. <최고의 하루> 포스터처럼 잘 나올 필요는 없지만 어쨌건, 일종의 여름 미션 같은 거지.
어쩌다 보니 여름의 초입에 원주에 머무르게 되어버렸다. 원주 흥업면 미촌의 새로 지은 시골집들 담벼락에도 능소화가 있었다. 하지만 나를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셀카 같은 걸 원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투덜투덜. 아무도 듣지 않는 불평을 하면서, 능소화를 찍었다. 능소화와 찍히는 날도 있겠지. 쨍한 여름 하늘색이 배경이 되니 능소화만으로도 예뻤다. 그래도 내가 있어야 하는데. 능소화 사진만 찍어 올리던 7월의 어느 날, 친구가 능소화 전설을 문자로 보내왔다. 궁녀가 임금을 기다리다 기다리다 죽고, 그 집에 피어난 꽃이 능소화로... 알겠습니다. 알겠고요. 어휴 거봐, 내가 사연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잠시 능소화 미션을 잊고 있던 폭염 중에, 또 우연히 능소화가 담을 감싼 집을 지나게 됐다. 제가 능소화를 참 좋아하는데요. 내가 이 말을 꺼내자, 함께 산책 중이던 예술가들이 우르르 능소화 정보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화라는 소녀와 소화라는 소녀가 있었는데.. 뭐 이렇게 전설마다 죽음으로 끝나? “그래서 독이 있잖아요.” 네? 독이라고요? 능소화 꽃가루에 독성이 있어서, 아이들은 능소화 아래에 함부로 가면 안된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기구한 꽃이군. 그 말을 하는 대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름이 가면, 능소화도 가버리니까. 이제 곧 지겠어요.”
오늘은 꽤 오래전에 청계산에 등산을 가기로 약속했던 날이다. 하지만 등산을 주선한 친구가 바빠지고 폭우가 오면서, 우리의 산행은 잠정적으로 취소됐다. 알람 따위 맞춰두지 않고 느긋히 일어났을 때, 처음 본 글자는 “무조건 밖에서 놀아야 하는 날씨”였다. 눈을 덜 뜬 채로 창 밖을 올려다보니 과연 그랬다. 그렇다면 소풍이지! 역시 작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서울 한 중간에 넷 중에 셋이 모이고 나니 두시였다. 진짜 잔칫집에서 잔치 음식을 와장창 먹고, 막걸리를 각 일병 했을 때 겨우 한 시간 남짓 지나있었다. 그렇다면 커피지! 커피를 마시고 와플을 먹고도 겨우 또 한 시간이었다. 도대체 뭐하는 인간들이야? 금요일 한낮에 갑자기 만나자고 해도 만날 수 있는 인간들이지. 크게 할 일이 있지는 않아서 네이버 지도가 카페에서 17분 걸린다고 알려준 인왕산 수성동 계곡에 갔다. 이렇게 오르막이라고 알려줘야 되는 거 아니야? 85도 경사에도 살았다며 잘난척하는 한 사람과, 술에 약한 두 사람이 허덕이며 오른 서촌 꼭대기 계곡 입구에는 마을 버스정류장과 능소화가 있었다. 거짓말처럼, 겨우 몇 송이가 늘어져있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독을 품은 꽃과 사진을 찍은 오늘은 8월 31일. 오르막은 힘들고 내리막은 순식간이라는 것을 배운 날. 그러니까 평생 내리막길이나 걸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하지 말자, 안 그래도 삶이 내리막인데. 그런 말들을 하며 걸어내려 온 날. 공식적으로 여름이 끝나는 날.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