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For Good
세상이 너무 시시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어떤 면에서는 끊임없이 “왜?”를 묻던 때가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시시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시시하다’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볼 정도였다. ‘신통한 데가 없고 하찮다.’ 정의가 마음에 들었다. 정말 신통한 데가 없는 일상이었고, 감정의 요동조차 잦아들어 대개의 것이 하찮았다. 아무것도 기쁘지 않았고 어떤 일도 슬프지 않았다.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많이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평생이 새삼스러울 지경이었다. 가능하다면 타노스가 손가락을 튕겨주는 게 좋겠는데. 그런 생각만 했다. 파스스. 가루처럼 사라지자. 이왕이면 랜덤이 좋겠지만, 나는 반드시 사라질 거야. 남아서 살아있음을, 이 지리멸렬함을 감당하지 않을 거야. You were slain by Thanos, for the good of the Universe. 멋진 문장이다.
눈알을 찌르는 안구결석 증세로 아무데서나 눈물을 흘리고 다니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당신의 세상이 시시한 게 아니라, 그가 시시한 사람이었던 거라고.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날도 같은 노래를 들었다. 엘파바가 오즈를 떠나 서쪽으로 날아가던 날, 글린다와 함께 부르는 노래. 이 노래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엘파바가 ”Everyone deserves the chance to fly!”라고 외치는 순간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따돌림을 받는 내게도, 한 번쯤 날개를 펼 기회가 있다고. 홀로, 자유롭게. 지금은 그 직전, 엘파바와 글린다가 대화하는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
- 나와 같이 갈래?
- ...
- ...
- 행복해야 해. 네가 선택한 길.
- 너도. 너를 축복할게.
= 다 이룰 수 있기를, 후회 따윈 없기를.
엘파바가 손을 내민 뒤 잠깐, 아주 짧은 순간. 글린다는 선택한다. ‘행복해야 해’라는 당부가 거절의 대답이 된다. 너와 함께 가지 않을 거야. 너의 방식으로 행복해지지 않을 거야. 나는, 내 선택으로 행복해져 볼게.
그 길 안에서 원하는 일을 다 이룰 수 있기를. 오늘 이 빗자루에 타지 않은 일을 후회하지 않으며 살아가기를.
네가 날아가 버린 세상에서, 부서지지 않고, 난 여전히 나를 끌어당기는 중력을 견디며 살아가 볼게. 두 발로 버텨볼게. 마침내 행복할게.
I hope you're happy, my friend.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