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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Sep 07. 2018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009. 편지


며칠 전 계약서를 하나 받았다. 요새는 보통 계약서를 메일을 통해 PDF 파일을 받아서 확인하고, 그 위에 바로 마크업으로 사인한 뒤 다시 전송해서, 그걸 상대가 인쇄해 그쪽의 날인을 찍은 뒤 내가 보관할 1부만 보내주는 식으로 진행해왔다. 퀵으로 왔다 갔다 하거나, 이중으로 보내는 건 너무 귀찮은 일이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PDF에 날인을 하는 게 뭔지 이해가 안 간다며 자기가 보내면 사인을 해서 다시 전송을 해달라고 했다. 대신 귀찮으실 수 있으니까 계약서 봉투 안에 자기에게 보낼 봉투를 주소까지 써서 보내주겠다는데 ‘그렇다고 안 귀찮을까요...?’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라 그렇게 진행하게 됐다. 그리고 도착한 계약서 봉투 안에는, 규격 편지 봉투가 들어있었다. 뭔가 너무 규격이어버리는 바람에, 우표를 잘 붙여서 보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성실하게 볼펜을 들고, 계약서 옆면을 맞춘 자리에, 접은 자리에, 이름 옆에 싸인을 한 뒤 잘 접어 봉투에 넣었다. 역시 규격이라 그런지 딱 맞게 들어갔다. 


오늘은 편지를 한 통 썼다. 메일이었지만, 심정적으로는 편지였다. 안녕하세요. 기체 후일 향 만강하시옵고.. 는 아니고, 감사의 인사로 시작해 ‘다만’을 거쳐, 어떤 다짐으로 끝나는 편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꾹꾹 눌러 담는 대신에, 전하고 싶은 말을 가장 정제된 형태로 다듬어보고 싶었던 편지. 종이비행기 모양의 보내기 버튼을 누르는 것보다는 규격봉투에 넣어 우표를 붙여 보냈다면, 훨씬 잘 어울렸을 것 같은 편지. 


받는 사람의 생각이야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규격이 있으니까. 



그림일기 365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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