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문화비축기지
와인. 무화과와 프로슈토, 치즈. 마라탕과 샹궈와 꿔바로우. 마카롱으로 이어진 집들이의 끝은 커튼봉을 달기 위해 콘크리트 벽에 구멍을 내다가 발생한 미세먼지 긴급 경보였지만, 산책은 좋았다. 한강에 바로 붙어있지 않아도 이렇게 좋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배드민턴을 치고, 킥보드를 타고, 이렇게 많은 가족들이 이토록 느긋하게 살아가고 있다니.
반환점은 문화비축기지였다. 콜로세움의 일부를 잘라둔 것처럼 보이는 건물 벽 안 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갑자기 무대와 관객석이 등장한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저 무대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떠들었다. 셰익스피어나 그리스 신화가 떠오르지 않아? 맞아 맞아. 오페라, 성악을 하면 정말 얼마나 좋을 거야. 뒤쪽이 숲으로 막혀있으니까 발성 좋은 연극배우가 연기하면 육성으로도 다 들릴 거 같은데. 그냥 뮤지컬 갈라만 해도 좋겠다. 무대 뒤쪽 너머로 건물들이 안 보이고, 그 빛의 방해를 안 받는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이야. 맞아 맞아.
그렇지만 공무원들은 쇼미 더 마포 같은 거 할걸요? 결국 한마디로 결론이 났다. 이런 젠장. 어찌 됐건 저 벽에 빔을 쏴서 영화를 보면 정말 좋을 거 같아. 구멍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별빛 같았다. 그리고 저기, 저 유난히 밝고 붉은빛을 내는 별은 화성. 문득 발성이 좋은 배우가 저 무대에서 ‘임파서블 드림’ 같은 걸 부른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가네, 저 별을 향하여-
좀 집 다운 집에서, 이런 느긋한 산책을 누리며 살고 싶다는, 드림, 임파서블 드림.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