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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Feb 07. 2018

Hi, how are you?

한국이 추워서

6th, Fabruary. 2018 / Clear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경을 두고 왔다. 사실은 두고 온 것은 아닌 것 같다. 출국하는 날 아침에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아침까지도 쓰고 있던 안경을 넣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출국날 아침, 여하튼 대강 가방을 다 싸고 평화롭게 화장실에서 마지막 일을 본 뒤 떠날 생각이었는데, 아빠 때문에 화장실이 막혀버린 것이다.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왜 출국 날 아침에 막힌 변기와 마주해야 하는가. 공중화장실을 잘 이용하지 못하는 나는 몸이 안 좋다는 아빠에게 어서 변기를 뚫으라고 난리를 쳤는데, 결국 해결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무겁고 미묘하게 아픈 배를 끌어안고, 합이 대충 40킬로가 넘는 짐을 이끌고 집에서 도심공항까지 가는 택시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내가 비행기를 막 탔을 즈음 아빠가 고열로 기절하시는 바람에 나는 희대의 불효녀가 되고야 말았는데, 여하튼 그때까지는 난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겪은 아침이었기 때문에 안경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행기에 들고 탄 가방에 안경이 없다는 사실은 경유지였던 상해의 푸동 공항에서 알게 됐고, 부친 캐리어와 보스턴 백에도 없다는 것은 도착한 날, 그러니까 떠나온 다음 날 저녁에야 알게 됐다. 엄마는 집에 안경이 있다고 했다. 금테 안경. 그건 내가 작년 봄 새 안경을 맞추기 전까지 썼던 것으로, 미묘하게 초점이 안 맞지만 그 안경을 받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와보니까 선글라스가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은 거다. 신발도. ‘언니, 그렇다면 제 것도요’라며 부탁한 친구의 신발을 주문해 추가하고, 왜 두고 왔는지 모를 좋아하는 여름 원피스와 셔츠까지 받으려고 하다 보니 소포를 부쳐달라고 부탁할 날이 계속 미뤄졌다. 그동안은 하루에 렌즈를 16시간 정도 끼고 있어야 했다. 왼쪽 -3, 오른쪽 -4.5 디옵터에 왼쪽 눈에는 심각한 난시가 있는 나로서는, 정말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조금씩 무언가를 추가해 넣으며 소포를 받을 날을 미뤘다. 그 사이에 엄마가 맞춘 지 9개월도 지나지 않은 내 안경을 찾기를 바라면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데 삶에서 필수적인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면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도착한 소포 속에서 안경 닦는 천으로 싸여 새 신발 안에서 발견된 안경은, 당연히 금테 안경이었다. 그때서야 검은테 안경을 잃어버렸든 아니든, 설사 그 안경이 한국 엄마 집 나의 방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 하더라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여기서의 나는 초점이 조금 안 맞은 채로 지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것이 조금 부족하고, 어딘지 모르게 흐릿하며,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임시인 채로. 안경을 다시 맞추기 전까지, 가방을 다시 싸기 전까지,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그러니까 이건, 또 임시의 기록이다. 초점이 안 맞는 안경을 쓰고 써 나가는.



한국이 추워서

한국의 겨울이 싫어서 호주의 여름을 찾아 대책 없이 떠나온 사람의 멜버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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