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One Day at a Time
스페인어를 배운 적이 있다. 벌써 6년 전이다. 즐겁게 배웠고,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과 스터디도 했다. 스터디 그룹의 이름은 AA. ‘Ahora, aquí’. ‘지금, 여기’라는 뜻이다. 겨울인데도 모여서, 합정의 지금은 사라진 카페 구석에 함께 앉아 스페인어를 공부했다. 엄청 느긋하고 느슨한 스터디였기 때문에, 공부를 진지하게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엄청 가깝게 친해진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그런 모임이 처음이라 낯설었지만, 좀 이상할 만큼 편안했다. 지금도 모두를 기억한다. 단, 스페인어 이름으로. 나와 동갑이던 둘시네아(그 <맨 오브 라만차에서 따온 것이 맞다>)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호주, 시드니에 갔다. 브리즈번으로 갔던 나는 돌아왔지만, 놀랍게도 둘시네아는 계속 거기 살고 있다. 축구 때문에, ‘이기다, 행복하다, 세계’ 같은 단어만 제대로 기억하고 자주 듣지만, 아주 쉬운 문장은 뉘앙스로 이해할 수 있다. 쉬운 단어도 들린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초급 오브 초급이지만, 스페인어는 적어도 내가 발음할 수 있고, 가깝게 느끼는 언어다.
<원데이 앳 어 타임>을 보라는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지만 보지 않았다. 그 유명한 맨스플레인 짤방이 돌 때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뭐 대체로 그렇다. 나에게 드라마는, 언제나 때가 있다는 느낌이다. 그럴 만할 때 보게 된다. 특히 좋은 드라마는 모두 그랬다. 아니면, 그런 때에 봐서 좋은 드라마가 됐거나. 아무래도 좋다. 며칠 전 심각한 불면증이 찾아왔고, <원데이 앳 어 타임>을 뒤늦게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무 좋아서, 아껴보기로 했다. 지금도 아껴보고 있다.
리디아가 너무 좋다. 스페인어 단어를 섞어 쓸 때, 영어를 스페인어 식으로 발음할 때, 아무 때나 갑자기 “1963년, 하바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다. 아침마다 춤을 추며 아침을 차리는 것이 좋다. 춤추고 노래하고 음악을 듣고 수영을 하는 나라에서 태어날 것을. 쿠바는 어떤 곳일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다시 배우고 싶은 언어가 있다는 것이, 그 미미한 향수를 누군가 만들어 낸 세계 속의 일흔이 넘은 할머니가 스페인어 억양이 섞인 영어를 말하는 것을 보며 느끼다니. 도대체 나의 노스텔지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젊을 때의 세뇨리따를 그려보았다. 립스틱은 그때도 지금도 데낄라 썬라이즈. 오늘은 두 편만 보고 자야지. 그리고 결심했다. 나중에 오늘에 대해 말할 때, “2018년, 망원동!” 하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