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반창고
나란 인간은, 굳이 말하자면 조심성이 없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쟤는 저렇게 덤벙거려서 어쩌냐고 했지만, 사실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발이 몸에 비해 좀 작아서 남들보다 조금 잘 넘어지는 정도지 특별히 덜렁댄다거나, 덤벙댄다거나, 뭐 그런 거라고는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종이에 좀 잘 베고, 발 피부가 약해서 새 신발을 신으면 피가 좀 나고, 여기저기 살짝 부딪혀서 멍이 좀 잘 드는 그런 정도. 그 정도는 뭐 누구나 그런 것 아닌가요?
조심성이 없다는 사실은 성인이 된 뒤에 알았다. 폰 액정을 한 서너 번 박살내고 난 다음, 내가 뭘 잘 떨어뜨리는 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데나 부딪히고, 머리를 박고, 그렇게 살아온 것 치고 다행스럽게도 큰 사고는 없었다. 여전히 작은 사고들이 끊임없이 있을 뿐이다.
후쿠오카에서 발가락에 피가 나는 바람에 반창고를 샀다. 반창고를 사며 생각했다. 도대체 왜 어딜 가도 반창고를 사는 거지? 멜버른 시티의 가장 큰 백화점 앞 벤치에 앉아 발에 밴드를 붙이고 있었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도 반창고를 사는 게 그렇게 아까웠다. 왜냐면 집에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좀 지나치게 많이. 그 정도라면 한 서너 개쯤은 들고 다닐 법도 한데, 들고 다녀도 봤는데 또 그럴 때는 밴드를 붙일 일이 없고, 파우치 안에서 종이 접착력이 떨어진 채로 굴러다니는 게 보기 싫어 버리고, 그러면 또 어디선가 피가 나는 것이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여행 정도면, 좀 들고 갈 만하지 않을까? 도대체가, 나란 인간은.
오늘은 좀, 정신이 빠져있는 날이었다. 아마도 날씨 때문이었을 것이다. 커피도 너무 늦게 마셨다. 이런저런 일을 마치고 간단한 장을 봐서 집에 돌아왔다. 오늘 갔어야 하는 병원은 목요일이 새로운 휴진일이 되어있었다. 나는 가려던 가게나 병원이 닫는 것에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 그냥 있는 일이니까. 새로 산 각티슈의 포장을 뜯겠다고 가위를 썼다. 가위를 다 쓰고 손잡이를 고리에 걸어두려는데, 가위가 날이 아래인 채 그대로 떨어졌다. 정확하게 내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 사이의 살 부근으로. 양쪽으로 0.5cm 씩만 비껴갔어도 큰일이 날 뻔한 순간이었다. 날 끝이 스쳐간 살 위로 피가 났지만, 이 정도라면 내 기준에서 행운이라고 부를 법도 했다. 침착하게 잡동사니를 넣어놓은 파우치를 뒤져보았다. 이번에는 반창고를 넣어가야지,라고 생각하고 파우치에 넣은 기억이 있는데.. 그 파우치를 안 가져왔다. 어제 찾았는데 없었던 수분크림도, 몇 가지 소품도 거기 있었나 보다. 아아.. 또 멍청한 소리를 낸 뒤, 피를 닦아냈다. 뭐 이 정도 상처는 알아서 아물 것이다. 흉터는 남을 수도 있겠지만. 반창고는 필요 없다.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베란다에서 들어오다가 거울에 새끼발가락을 찧었기 때문이다. 너무 아프고, 어쩐지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 물론 감기약과 해열제도 그 안 들고 온 파우치에 들어있다.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다.
라고 1시 23분에 쓴다. 그러니까 내 기준에서.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