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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Oct 05. 2018

수채 구멍의 머리카락


028. 머리카락을 잘 치우자


수채 구멍에는 머리카락이 모이게 되어있다. 샤워를 하고 나서 걷어내 버려야지, 생각하고 깜빡 잊으면 바로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모인다. 그걸 걷어낼 때마다 나는 늘 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 사람은 바로 2PM의 멤버이고, 최근에는 연기를 하고 있는 이준호다. 


올해로 그룹이 데뷔 10년이니, 대충 8-9년 전쯤의 기억일 것이다. [주니어] 같은 느낌의 잡지에 나온 인터뷰 기사의 말미에, 인터뷰이가 마지막 질문으로 멤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우여곡절이 많은 그룹이었으니 다른 멤버들은 모두 뭐 서로 잘하자 힘내자 내가 잘할게 사랑해 고마워 같은 뻔한 말들을 했을 것이다. 당시 좋아했던 다른 멤버의 답변도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뻔하고 예상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준호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숙소 욕실 수채 구멍의 머리카락 좀 잘 치우자.”


치우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했던가. 이건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여하튼 남자만 여섯이 살았으니 얼마만큼의 머리카락이 모였을 것인가. 그 머리카락에 막혀 물이 잘 안 내려가거나 말거나, 누군가는 그저 룰루랄라 샤워만 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준호가 그 머리카락을 주워 모아 버리고, 약간의 잔소리를 했을 수도 있겠지. 이십 대 초반의 남자들은 아 그래그래, 대충 주워섬기고, 또 이준호는 수채 구멍의 머리카락을 치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머리카락을. 


이준호가 영화 <감시자들>에서 첫 연기를 하고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당연히 연기 잘하겠지. 수채 구멍의 머리카락을 치우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영광과 절망의 구간을 함께 지나고 있던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을 때, 정상까지 함께 가자거나 우리 멤버들 너무나 사랑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그거에 앞서서 수채 구멍의 머리카락을 잘 치워보자고 말하는 사람이니까. 한 번도 팬인 적이 없는 연예인인데도, 나는 수채 구멍의 머리카락을 보면 그를 생각한다. 대단하고 멋진 말을 할 기회가 온다고 해도, 혹은 좀 거대한 이야기나 세상과 만나고 붙어살게 된다고 해도, 샤워를 하고 나면 수채 구멍의 머리카락을 치워야 한다는 걸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고. 그리고 오늘의 머리카락은 오늘 치우자고.



그림일기 365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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