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가을 국화
친구네 고기를 얻어먹으러 가는 길에 빈손으로 가기가 그래서, 울산에 다녀온 하우스메이트가 집에서 꽃을 보았으면 해서, 밤 9시에도 여는 꽃집을 찾아가 가격도 싸고 오래가는 가을 국화를 샀다. 꽃집 사장님은 노란 국화와 보라색 국화를 한 단씩 반 반 섞어 따로 포장을 해주며 말했다. "만원이면 일주일이 행복하잖아요?"
산지 꼭 일주일이 지났는데 여전히 잘 살아있다. 중간에 한 번 꽃을 나눠 <일하는 여자들> 컵에 꽂은 꽃은 거실에, 작은 병 두개에 꽂은 꽃은 각자의 책상 위에 두었다. 친구는 어제 집을 떠나며, 자기 방 책상에 있던 꽃병을 거실에 내놓고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고 갔다. 아니, 그러면 2주일 살아있는 건데?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느지막히 일어나는 바람에 물을 갈지 못한 걸 떠올리고 말라가는 아래쪽 이파리를 떼어내고 줄기 끝을 약간 잘라낸 뒤 새로 담은 물에 꽂았다.
어제 그림을 그려놓고 올리는 걸 잊었다. 정신이 좀 없지만 이틀, 그리고 2주 치의 국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또 그것대로 다행일수도 있겠지. 잘 살아있으렴.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