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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Oct 15. 2018

토지에서 망원동까지, 122km.

서영인 에세이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토지에는 사실 책을 쓰러 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반 정도는 시나리오를 완성하러 갔고 나머지 절반은 책을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7월엔 투자 관련 문제로 서울을 오고 가며 사업기획서를 고치느라 60분짜리 단막극 대본을 시나리오로 고치는 일은 조금도 진전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떠올린 생각은, 원래 시나리오로 쓰려고 가지고 있던 트리트먼트를 고치는 게 차라리 빠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생각을 마감 한 5일 전쯤 했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는데, 너무 더웠기 때문에 대체로 잘못된 판단만을 했고 어쩔 수 없었다. 트리트먼트를 고치면서, 이건 글렀다는 확신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끝내기로 했다. 시작한 글을 끝내기. 겨우 그 정도만을 목표로 지냈다. 그렇게 지내며 사람들을 만났다. 토지에서 가장 기대하지 않은 것이었다. 


겨우 그 정도의 목표를 위해 밤을 새웠던 날, 영인쌤과 해연쌤은 내가 내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세미나실에서 잠을 잤다. 그 또한 뭐 어쩌겠는가. 우리 각자의 방에는 에어컨이 없었던 것이다. 그날 쌤의 등을 그나마 덜 배기게 만들었던 다이소 요가 매트는 8월까지 머물렀던 나에게로 왔다가, 9월에 다시 머무르게 된 해연쌤에게로 넘어갔다. 그래서 지금은 대체 어디 있을까. 우린 그런 거는 모르고, 갑자기 우르르 나오게 된 책을 들고 어디서 만나서 또 어떤 아무런 이야기들이나 하며 떠들지를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와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쓰자면, 영인쌤에게 받은 것은 이 책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뿐만이 아니다. 더위, 이대로는 안된다며 우르르 인터불고 호텔에 갔던 날 밤, 나의 터무니없는 미래 계획을 상담받았고, 서울의 이비스 앰베서더에서는 라운지의 맥주와 안주 세트를 얻어먹었다. 마라톤과 망원동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며 신나 했다. 망원동으로 짐을 옮긴지 며칠 지나지 않아, 쌤은 내게 사과와 포도, 그리고 청귤청을 전해주었다. 망원 유수지 앞 CU에서 만나자. 대체로 잠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는 내가 무색해지게 깔끔한 운동복을 입은 쌤은 쇼핑백을 주고는 달리기를 하러 한강 쪽으로 떠나갔다. 책도 같은 루트로 전해졌다. 인터넷 서점에 올라오자마자 주문했더니 출고일이 늦어져 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불평했더니, 달리기를 하러 가면서 한 권 줄게- 하시는 거다. 염치도 없이 또 잠옷을 입고 나가 책을 받아 들었다. 그 책을 연휴에 맞춰 고향으로 내려가는 친구에게 선물하고 혼자 뿌듯해했다. 


[이나 님. 이거 정말 너무 좋은 책인데요?]


당연하지. 친구가 보내온 문자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읽을 쌤의 책은 아직 배송도 받지 못한 채였지만,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칭찬을 받은 양 의기양양해졌다. 당연히 좋은 책이지, 그럼. 안 좋을 수가 있어? 나로서는 오랜만에 종이책이었다. 오래, 꼼꼼히 다시 볼 문장들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귀퉁이를 열심히 접어가며 읽었다. 이런 문장들이다.


신체의 노화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모두 늙는다. 그러나 노화에 따른 장애나 결핍을 노화를 핑계로 방기 하는 것은 문제다. 한 끗 차이로 꼰대가 된다. p86


반대의 상상을 해 보자. 내 것이 누구의 것보다 낫다고 증명할 필요가 없고, 내가 받은 것을 정해진 기한 내에 굳이 토해낼 필요가 없는 세계, 그런 곳에서 예술은 어떻게 존재할까. p129


글쎄, 나도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소득의 명목이 쪼개질수록, 나라는 인간도 낱낱이 쪼개진다. 수십 장의 신고서를 챙기면서 나는 십만 원, 오만 원을 합산하는, 낱낱의 사유화된 소득에 집착하는 지질한 인간이 된다. 수십 장의 신고서에 기본 소득서가 한 장 더 포개진다면, 나는 아마도 온갖 일을 하다가 하무 일도 안 하는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많은 일을 하는, 문학하는 인간으로 통합될 수 있지 않을까. (...) 전체로서의 한 인간 자체를 상정할 수 있는 물적 토대. 혼자서 죽도록 일하고 쥐꼬리만 한 사유재산에 전전긍긍하는 인간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 속에 공존한다는 존재감. 나에게 기본소득의 상상력은 그런 것이다. p134


이 책의 기본소득 챕터는 전부를 옮겨적고 싶을 정도다. 아, 실어증과 꼰대에 대한 부분도. 명절 이야기도. 맞다. 아파트, 아파트에 대한 부분도. 어쩔 수 없다. 또 읽는 수밖에. 책의 후반부는 망원동에서 발견한 가게들, 대체로 식당, 술집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데 내가 가 본 가게도, 가보지 않은 가게도 있다. 가본 곳에 대해서라면 대체로 비슷한 소감이다. 아루감 이야기는 미나 언니가 좋아할 것이다. 아루감에도 책을 한 권 선물해야겠다.


이렇게 망원동 마니아처럼 쓰고 있지만 사실 나는 망원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2017년 1년을 꼬박 살았고, 좀 떨어져 있다가 다시 돌아와 한 달째 살고 있지만 크게 생각이 변하지는 않았다. 내게 망원동의 입지 조건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은 한강과 인접해있다는 것 말고는 없으므로, 한강 입구와 3분 거리가 된 지금이 좀 나을 뿐이다. 특히 안 좋아하는 길은 망원시장 2번 출구로부터 망원시장 입구를 지나 망리단길과 닿을 때까지의 길이다. 망원동 주민들과 망원동에 구경을 온 사람들과 망원동 뜨내기들과 망원동을 지나치는 모든 사람들이 얽혀있는 그 길의 소란함과 복작스러움에서 대개 나는 피로를 느낀다. 그래도 망리단길을 지나고부터는 좀 나은데 왜냐하면 사람이 확 줄고, 스몰 커피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멜버른에서 가끔 망원동이 아닌 스몰 커피를 그리워했었다. 거기서 플랫화이트를 마시며 나누던 시시하고 한심한 이야기들을.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내가 망원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지 가끔 염려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망원동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좋아하지 않더라도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사람들은 내가 망원동을 좋아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망원동을 좋아했다. 작가가 이래서 될까? 이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질색을 하고, 소박하고 작은 무엇에서, 인간이 살며 남기는 흔적과 냄새에서, 아름다움이나 잊혀져가는 가치를 발견하려고 하지 않아도 될까? 역시 작가라면 망원시장의 가치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무려 장미여관 육중완도 발견한 매력인데 내가 몰라도 괜찮을까? 답은 당연히 괜찮다는 것이었고, 사실은 염려하는 척했을 뿐이지 염려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별로인 걸 뭐 어떡하란 말인가. 영인쌤이 아름다운 에필로그에 쓴 “나에게는 나의 망원동이 있다”는 문장을 나 따위가 ‘아 저는 망원동 별로라’라고 말하라고 쓴 것은 아니겠지만, 또 내 맘대로 밑줄을 그어본다. 내게는 나의 망원동이 있습니다. 살아가고 있는 동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생각보다 나쁜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이제는 여기 어딘가에 영인 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좋다. 


나는 영인 쌤이 맛양값(이게 식당의 이름이라는 것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으로 상징되는 동네에 살면서도 “늘 주장하는 말이지만 예쁜 것들, 맛있는 것들은 까다롭다. 조금씩 비위를 맞춰 가며 담아내고 맛보고 즐겨야 한다. 싸고 맛있고 푸짐한 것은 없다.”라고 단호하게 쓰는 사람인 것이 좋다. 그 안에서 제대로 된 가게를 발견하고, 그걸 어느 날의 기억과 연결 지어 다정하고 유쾌한 에세이를 쓰는 사람인 것이 좋다. 쌤이 괴로워하는 나를 앞서 총총총 산뜻하게 뛰어 70분도 안 되는 시간에 10km를 주파하는 사람인 것이 좋고, 호텔 휴식의 가치를 알고 나누는 사람이어서 좋다. 냉동실에서 맥주를 꺼낼 때마다 ‘맥주는 히야시야’라고 한 이백 번쯤 말하고, “책 펀딩 안될까 봐 사실 걱정했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해주는 사람이어서 좋다. 책 읽다 말고 세신 받는 목욕탕 어디냐며 긴급응급을 외치는 철없는 나에게 인생 세신사의 10월 일정까지 알려주는 사람인 것이 좋다.


내가 토지에는 사실 책을 쓰러 갔다고 했던가. 그렇다. 8월에 써야 했다. 10월 말 마감이었기 때문이다. 더위가 지나갔으니 좀 써보겠다고 폼을 잡다가, 다른 자잘한 마감에 휘말리고, 그러다 국가기관과는 결코 다시는 일하지 않으리라 다짐도 하고, 투자 심사의 막바지에 당도하고, 뭐 그러다가 시작을 못했다. 마감을 미루다니 이것은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인데, 하지만 자존심이 뭔데. 니가 뭔데 허락을 하고 말고야. 결국 나는 출판사에 연락해 사정을 말하고 미팅을 잡았다. 공교롭게 망원역 탐앤탐스가 미팅 장소가 됐다. 망원에 살며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곳이었다. 영인쌤이 흡연석이 있는 데다가 조용해서 작업을 자주 한다고 했는데. 과연 흡연석이 있었고, 조용했고, 테이블 간격이 넓었다. 하지만 내가 쌤은 믿어도 무려 김치 프레즐을 파는 탐앤탐스 커피를 믿을 순 없는 일이었다. 술은 한 방울도 안 들어가 있는 번다버그 진저비어를 마시며,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비어는 히야시죠. 어찌 됐건 지금까지의 상황은 이렇고 저렇고 이러저러한데 말입니다. 마감일을 조금만 늦춰도 될까요? 관대한 대표님의 허락을 받고 (허락은 자존심이 아니라 대표님이 하는 것이다) 그제야 안심을 한 나는 창가로 자리를 옮겨 잠시 그날의 마감을 하는 척했다. 영인 쌤이 여기서 책을 썼다고 했지. 그럼 나도 이제 진짜로 써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책을 읽으며 ‘웃으러’의 밀실에서 쌤이 못해서 아쉽다는 파티를 대신 우리가 해야지 생각하며 접어두었다가, 결국 ‘웃으러’가 없어졌다는 부분을 읽고 어쩔 수 없지 파티는 호텔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여기, 망원동에서, 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던 또 다른 한 사람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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