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경기 날마다 달리기를 하기로 한 건 정말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문득 ‘이번이 메시의 마지막 월드컵이라면’이라는 가정이 떠오르자 그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뭐라도 해야겠고, 언제나처럼 달리기 밖에는 답이 없었다. 생각을 없애주고, 건강에 좋고, 돈이 안 드는 유일한 운동. 6.24km를 달리기로 한 건 더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보통 3km를 세팅해놓는 러닝 앱을 조절하다가 곧 메시 생일이라는 게 떠올랐고, 그렇다면 생일에 맞춰 달려볼까 싶어 진 것이다. 물론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으리라는 건 달리자마자 깨달았다. 왜 그런 건 미리 깨닫지 못하는 걸까? 한참 안 달려서 그런지 4km부터는 목표까지 얼마나 남았다는 어플의 독려 목소리를 모른 척 하고 싶었다. 3월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래도 나처럼 4월쯤에 태어났으면 좋지 않았을까? 그래도 가을이나 겨울에 태어나지 않은 게 어디야, 뭐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겨우겨우 느릿느릿 달렸다. 걷지는 않았어. 나로서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아이슬란드와의 첫 경기는 비겼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까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 경기다. 영화감독이 본업이라는 아이슬란드의 골키퍼가 메시의 페널티 킥을 막았던 그 순간. 그 드라마에 더해 전날의 포르투갈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와 비교하며 쏟아질 말들이 이미 보였다. SNS를 지우고, 필요한 순간 외에는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는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꼭 대표팀에 복귀를 해야 했을까? 저번 코파 준우승 후 은퇴를 했을 때가 아르헨티나를 내려놓기 가장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을까? 그때보다 나쁘면 나빠졌지 나아질 리가 없는 선수진을, 끔찍한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를 모를 리가 없는데 왜? 자신은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까? 아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도대체 왜?
크로아티아 전을 앞두고 다시 달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일단 시작한 이상 포기하기가 싫었다. 무려 제주도에서 모르는 길을 달리면서 생각했다. 그래, 그렇다면 메시도, 시작한 이상 포기하기 싫었을 수 있겠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지독한 프로의 세계에서 십 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로 매 시즌을, 여름의 국제 경기를 뛰면서, 그 어떤 경기도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월드컵을 포기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당장 다음 경기를 뛰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3:0으로 진다고 해도. 조별 탈락 위기에 몰리고 아무리 많은 비난을 듣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리오넬 메시의 삶과는 일말의 상관도 없는 내가, 그러니까 오직 리오넬 메시에게는 받기만 해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사는 게 이토록 시시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계속해나가는 것. 그게 겨우 한 발자국 씩을 떼어 앞으로 나아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러니까 나이지리아와 경기를 한 날처럼 강풍이 몰아친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 6월 24일이 지나갔고, 리오넬 메시는 서른한 살이 되었다. 메시가 지금의 동료들과 함께 U-20 월드컵을 우승했던 때에도, 아르헨티나의 동료들과 함께 생일을 맞이했었다. 2005년의 그 우승컵이 이후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 동안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고 다시는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간 동안 클럽에서는 셀 수 없을 정도의 트로피를 들어 올릴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겠지. 나 역시 그걸 모르고도 그때부터 리오넬 메시의 축구를 봐왔다니, 정말 얼마나 대단한 행운인가. 오직 리오넬 메시를 생각할 때만, 내 인생의 사소하고 잦은 불운들이 겨우 그따위 것으로 느껴진다. 정말로 그렇다. 달리기 말고는 딱히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한 몸을 침대에 처박고 본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메시가 골을 넣었고, 로호가 골을 넣었다. 16강이었다. 메시가 겨우겨우 끌어올려 억지로 이겼던 남미 예선 마지막 경기가 생각났다. 리오넬 메시, 이 정도면 할 일은 다 했어.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경기를 하는 팀은 총 네 팀이고, 7경기를 뛴다. 16강이라면 네 경기를 뛰고 떨어지는 거니까, 꼭 절반의 기회까지 받는 것이다. 비를 피해 16강전에 하루 앞서 네 번째로 달리면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넘기 힘들겠지, 아마도. 운으로는 우승을 할 수 없다. 메시의 아르헨티나가 한 번의 월드컵, 세 번의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을 하는 걸 보며 알게 된 건 그거 하나였다. 한 선수가 한 경기를 구원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한 선수가 한 대회를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게 리오넬 메시라 하더라도. 그리고 묘하게 침착한 상태로 16강 전을 지켜보면서는 인정하게 됐다. 메시의 전성기는 지나가 버렸다. 이제는 당연히 떨어지고 있던 메시의 신체적인 능력을 센스와 지능으로 채워 넣어 유지하고 있던 100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고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는, 메시가 점점 이전과 같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는 모습을, 천천히 내려가는 길을 지켜봐야 한다. 한때는 생각조차 하고싶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패배 후에야 들었다.
지금까지, 사실 이번 프랑스와의 16강 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를 억울하고 화나게 만든 것은 당연히 아르헨티나였다. 이번만이 아니라 메시를 응원해 온 내내, 메시의 어깨 위의 아르헨티나라는 지구가 너무 끔찍하고 싫었다. 저 봐. 나머지 열명이 저렇게 축구를 못하는데, 메시 보고 어쩌라는 거야? 저러고 또 얼마나 메시를 비난하고, 메시 탓을 할까 정말 지긋지긋해. 그 말을 십 년 넘게 했다. 하지만 젊고, 힘 있고, 빠른 프랑스와의 경기를 보는 일은-그러니까 메시의 눈 앞에서 메시보다 10살도 넘게 어린 선수가 새로운 세대의 스타로 태어나는 장면을 지켜보는 일은 나에게 전혀 다른 깨달음을 줬다. 아르헨티나는 늙었다. 나는 아르헨티나만 늙은 줄 알았는데, 메시도 아르헨티나였다. 나의 슬픔과 상관없이 이 패배는 너무나 정당하다. 아르헨티나는 졌으나 메시는 이기는, 그런 건 없다. 팀이 지면 선수도 진 것이다. 7월이 오기도 전에, 메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월드컵은 끝났다. 슬프고, 멋진 일이다.
그리고 나는, 네 번 똑같은 거리를 달리고 네 번 아르헨티나 경기를 봤다. 리오넬 메시가 포기하지 않는 것을, 그럼에도 지는 것을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전이라면 뚫어냈을 수비를 뚫지 못하고 넘어지는 순간을, 이기겠다고 시간을 보내겠다고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다시 한번 깊이 숙여진 고개를 봤다. 하프 타임에 동료들을 모아놓고 팀 토크를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하지만 이번에는 무릎을 꿇고 했던 그 세리머니를 봤고, 어시스트 후 그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와 골을 기록한 동료를 안아줄 때의 표정을 봤다. 90분 경기인데 93분에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봤다. 고통스러웠고, 기뻤고, 슬펐다. 내 감정이 묻어있는 이 장면들이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 시시한 날들에 어떤 자국 같은 것을 남겼다. 나중에 돌아보면, 거기 무엇인가 있었다는 표식 같은 것. 패배지만 실패는 아닌 것. 세상이 실패로 기억하더라도, 나는 다르게 기억하기로 결심한 어떤 것을.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은 어쩌면 리오넬 메시의 축구를 처음부터 지켜본 것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