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나 May 23. 2018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

#법무부장관_해임 #내몸은나의것 


주제는 낙태죄, ‘남자들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써야 할 글의 주제와 내용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는 바로 의문이 떠올랐다. 이걸, 남자들에게, 고할 필요가 있어? ‘생리가 늦어진다’는 문장에서 그 어떤 공포도 읽을 수 없고, 임신중지 이전에 임신의 가능성 조차 없는 존재들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한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 한 번 낙태죄 폐지 이슈가 논의 테이블에 오른 지금 이와 관련해 가장 많은 말을 ‘얹고’있는 사람들의 성별이 남성인 것은 확실해보인다. 낙태죄 폐지에 대해 가장 소리높여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진영은 무려 여성은 사제가 될 수 없는 종교이고, 어떤 남성은 낙태죄 폐지가 가당키나 하냐며 그걸 논의할 시간에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성노동 여성을 ‘위안부’로 배당해달라는 청원을 내기까지 했다. 어디까지 밑바닥을 봐야할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됐건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및 도입과 관련한 청원에 응답하여 현행법제가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고 있음을 인정하고 논의를 이어갈 것을 발표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건 간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처벌법은 폐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21세기에 걸맞는 문명을 향한 걸음이기 때문이다. 


임신중지가 ‘죄’가 된다는 발상은, 결국 남성적 속성을 지닌 국가권력이 여성의 몸을 통제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발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나라는 여성, 특히 임신 가능한 젊은 여성의 육체가 근본적으로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뿌리깊은 인식을 가져왔고 그걸 드러내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2017년 벽두를 가임기 여성 출산 통계를 담은 ‘대한민국 출산지도’ 사태로 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런 인식 그 자체는 조금도 놀랄일이 아니다. 여성 개인을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 아닌 언제든 임신이 가능한 재생산 기계로 계산하는 국가에 사는 대한민국 여성에게는 자기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청와대 답변에 낙태죄 현행 법제에 ‘국가와 남성의 책임은 빠져있음’을 명시한 것은 중요한 진전인 동시에 반쪽 답변이기도 하다. 지금 낙태죄 폐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여성들은 임신 상태에 대해 국가와 남성이 함께 책임져주기를 원하는 것일까?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낙태죄를 폐지하라는 것은 임신중지를 처벌할 권리, 곧 나의 몸에 대한 권리를 나는 국가에게도 남성에게도 이임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내 몸에 대한 권리는 온전히 나에게 있다. 당연히 임신 상태를 유지하겠다는 결정이든 중지하겠다는 결정이든, 최종 결정의 권한은 그 몸의 소유자에게 있어야만 한다. ‘임신 원인에 남성과의 섹스가 포함되는데 왜?’라는 생각이 든다면 우선 임신중지 원인 남성 동시 처벌 청원을 하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은 낙태죄에 대해 남성의 책임까지 묻는다면 어떤 남성들은 그 세포의 일부가 자신의 정자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증명하기를 요구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경험했거나 알고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유발될 위험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임신이라는 사건이 그의 몸이 아닌 나의 몸,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므로 낙태죄의 폐지를 주장한다. 결국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와 전세계에서 임신중지의 권리를 주장해 온 여성들의 오랜 구호인 ‘내 몸은 나의 것’라는 표현을 모두에게 되돌려줄 수 밖에 없다. 


2017년 일반의 상식으로 보았을 때도 낙태죄가 모순일 수 밖이 없음은 단순한 한 사례로도 증명된다. 최근 네이트 판에 한 남자의 글이 올라왔다. 아내와 임신 계획을 세우던 차에 50대인 장모님이 임신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 남자는 아내의 부모가 경제적인 능력이 없음을 문제 삼아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모님이 임신중지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글에서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실제로 이 상황에서 임신중지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해보자. 임신중지 후 현행법 상 처벌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임신중지를 주장한 사위도, 임신의 원인을 제공한 장인어른도 아닌 장모님이다. 무려 그 글 속에서는 아예 자신의 의견이나 의지를 가진 존재로도 등장하지 않는 50대의 성인여성 말이다. 사위가 장모님의 임신중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동의를 구하는 상황 자체의 아이러니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임신중지 후 낙태가 죄인 현 상황에 의거 벌어질 징벌의 구조 자체가 모순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과 할 수 있는 논의는 사실 없다. 그리고 하고싶지도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위의 사례가 가진 모순을 이해했다면 지난 2012년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크지 않다”는 낙태죄 합헌 결정의 결론을 다시 언급하며 논증할 이유도 없음 역시 이해할 것이다. 조국 민정수석의 2013년 논문을 포함하여 이미 수많은 기사와 논문이 다양한 근거를 들어 왜 임신중지를 비범죄화 해야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정말 태아의 생명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세포의 어느 단계에서부터 태아로 봐야하는지부터 시작해서 이미 최소 십여년 이상을 살아온 여성의 생명은 또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그렇게 중요한 생명을 이미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이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권한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임신중지가 범죄일 때 때 태아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왜 여성에게만 주어지는지, 태아가 진짜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이 사회와 국가는 책임을 나누어 질 준비가 되어있는지 등등에 대해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고민하고 공부해본다면 좋을 것이다. 사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사람, 그러니까 낙태죄를 여성을 징벌하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낙태죄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남성이 자신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여성을 국가 공권력을 빌어 징벌하는 수단으로 낙태죄가 이용되어 온 것은 오래된, 그리고 흔한 일이다. 남성이 이 이슈에 대해 폐지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여전히 낙태죄 폐지 반대 서명에 그득한 남자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여성을 징벌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남성 일부에 대한 비판에 동참할 필요가 있다. 가부장제가 어떻게 여성의 육체를 소유하고 통제하려고 드는지,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왜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한지까지 논의해 볼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고민도 공부도 없이 낙태죄를 포함해 여성과 관련된 모든 이슈에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남성들이 여전히 있다. 실은 모든 이슈에 대해서 말할 권리가 오직 남성에게만 부여되는 줄 아는 경우도 많지만, 이렇든 저렇든 혐오 표현이 아니라면 말을 하는 것은 자유다. 나는 남자들이 낙태죄 폐지를 포함한 여성 이슈에 아예 말을 하지 않기를 요구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국가와 사회가 그들에게 어떤 권한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말은 중요하지도 않지만 사실 상관도 없다.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 몸은 나의 것이며, 모든 여성들의 몸도 그들 자신의 것이며,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인데. 그러니 남자들에게 할 말도 당연히 없다. 여성 관련 이슈에 더 많은 당사자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게 말을 줄이거나 아예 안 한다면 얼마나 좋아보이겠느냐만, 여성 이슈에 엄청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일이 엄청 기이하게 느껴지거나 말거나 말하고 싶으면 말해야지 어떻게 하겠나. 누가 어떤 말을 하든 내가 할 일은 한 인간으로서 내 몸에 대한 나의 권리에 대해 소리를 높이는 것 뿐이다. 


릴리 톰린 주연의 <그랜마>는 임신중지 비용 600달러를 구하지 못해 할머니를 찾아간 손녀와, 손녀와 함께 과거에 알았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빌리려고 시도하는 할머니의 하루를 따라가는 버디무비다. 이 과정에 손녀와 관계를 맺은 남자를 포함해 뭇 남성들의 존재는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고, 할머니와 손녀 역시 그들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남자들은 너무도 흔한 클리셰대로 임신을 했다는데 ‘내 아이가 맞긴 하냐’고 묻거나, 끊임없이 과거의 자신을 연민하며 여성을 증오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들과는 상관없이 레즈비언 할머니와 임신중지를 택한 손녀는 갈 길을, 원래 가려던 길을 간다. 우리도 남자들과 상관없이 갈 길을 마저 갈 것이다. 지금도 한국의 어떤 남자들은 여전히 ‘몸을 지 멋대로 놀리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임신중지가 어쩌고 하는 저 젊은 여자들’이 꼴보기 싫고 그 여자들이 소리내서 말하고 설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억울하고 분할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그들에게 해줄 말은 없다. 21세기에 살고싶지 않은 것도 자기 권리다. 그들이 과거를 붙잡으며 울든 댓글을 달든, 여성들은 자매들의 투쟁과 연대에 힘입어, 한 인간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갖는 문명으로, 미래로 간다.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



*이 글은 지난해 말 월간지 <플레이보이>에 '낙태죄 폐지'와 관련하여 기고한 글로, 온라인으로 따로 공개된 적이 없으며 편집부 최종 편집 이전의 버전입니다.


*이 글에서 ‘낙태죄’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그대로의 의미(임신중지 행위를 이유로 여성을 법적으로 징벌하는 일)로 썼지만, ‘낙태’로 써야하는 경우에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어감을 고려하여 임신중지로 표기하였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