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이케아 장바구니
지난 추석이 아니라 작년 추석에, 친구들과 이케아에 갔었다. 둘째 조카에게 줄 추석 선물로 이케아 조립 의자를 하나 샀다. 3-6세 아이의 집에 가면 있는 그 의자다. 그걸 택배로 보내면 추석 후에 갈 테니까 안된다며 이고 지고 다녔다. 왜 다녔냐면, 당시 살던 망원동의 집에서 바로 하남의 엄마 집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에 호텔에서의 1박이 있었다. TV 방영이 확정된 내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 드라마를 혼자, 내가 속하지 않은 곳에서, 나에게 잘해주며 보는 일이 그때의 내겐 중요했다. 호텔에도 그 의자 상자를 메고 갔다. 파란색 이케아 장바구니에 넣어서 말 그대로 짊어지고서. 그날 아침에는 전혀 예상치 않은 일로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욕에 가까운 비난을 받았고, 사실상 잘못한 게 없는데 납작 사과를 해야 하는 지금 돌이켜봐도 참 이상한 일이 있었다.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드라마보다는 그 전화를 받았을 때의 기분이, 그리고 집에서 카페로, 카페에서 호텔로 가는 길 내내 내 어깨에 매달려있던 파란 이케아 장바구니가 생각난다.
9월에 지금 사는 집으로 옮겨올 때 또 많은 짐을 담아온 이 장바구니를, 엄마 집을 오갈 때마다 쓰고 있다. 가져다 놓고, 가지고 온다. 대체로 옷가지다. 몇 권의 책이 같이 실려있을 때도 있다. 토요일에 행사를 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언제나 박스 같은 데 짐을 넣어야 하니까, 물건들이 제자리라는 게 없었거든요. 신혼집이 생긴 뒤에는 고심해서 어떤 물건을 한 자리에 놓고 나니까, 이런 게 안정이라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반드시 결혼이라서는 아니었다는 걸 지금은 알겠지만."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물건을 한 자리에 놓고 싶지 않다고. 언젠가 놓고 싶어 질 수는 있겠지만, 아니 과연 놓고 싶어 질까? 그리고 나는 가방에 접어서 넣어온 이케아 장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요일에 싱하 맥주를 마시며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근데 나는 사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임시라고 부르지는 않겠다.
엄마는 매번 버스 정류장까지 나를 데려다준다. 어깨에 메는 끈 대신 짧은 끈을 양손으로 나누어 그득 들어찬 파란 장바구니를 들고서 버스정류장까지 간다. 보통 서울로 돌아가 할 일이 뭔지 말한다. 운동을 등록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저번에도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패딩을 포함한 겨울 옷가지들이 들려있었다. 이번에는 행사 때문에 못 입는 옷가지를 가져가지 않았으니, 다음에는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다 읽은 책들도. 짐을 줄이고 싶어. 할 수 있다면 더욱 줄이고 싶다. 가능하다면 머무르지 않고 싶다. 그런 삶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면. 어딘가에서 또다시 나는 왜 이모양이지,라고 생각할 테지만, 그러고 나면 반드시 어쩌겠어,라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 할 테니까. 으쓱할 때 딱딱한 승모근이 덜 아프도록, 뭐가됐든 이 굳어버린 어깨가 좀 풀리는 운동을 해야겠다.
아이패드 프로와 펜슬을 산 게 아까워서 시작한
나 자신과의 1년짜리 약속.
ps. 나에게는 셀프 약속을 잘 어기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