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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Nov 15. 2020

목발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작년에는 예술인 지원으로 12회 차 상담을 받았다. 상담 막바지에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팔이 골절됐고, 깁스를 하고 상담을 하러 갔다. 마지막 회차 때 상담 선생님이 물었다. "팔이 다친 거에 대한 이나 님의 기분은 어때요? 화가 나나요?" 화가 났나? 잠깐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그래서 대답했다.


“뭔가를 배울 때는 한 번은 넘어져야 하는 것 같아요.” 


상담이 끝나고 곰곰이 나눈 대화를 복기하는데, 굉장히 멋진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에도 썼다. 정말 멋진 말이야. 앞으로도 뭔가를 배울 때 꼭 써먹어야지. 대사로 쓸 수도 있겠다. 상담이 끝났고, 일 년이 지났다. 2020년이었고, 이렇게만 말해도 모두 알 수 있을 법한 그런 날들이 흘러갔다. 아직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것, 그래도 아직 통장에 잔고가 있기는 한 것, 가족이 건강한 것, 그 정도면 정말 다행인 그런 날들이었다.


내 인생 운동이라고 생각한 줌바를 잃고 초여름에 폴댄스를 시작했다. 나는 종종 라이언 고슬링이 <크레이지, 스투피드, 러브>에서 엠마 스톤에게 했던 대사를 생각하곤 했는데, 근육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팔로 폴에 대롱대롱 매달리기에도 실패하다 보면 또 그런 생각은 멈추게 되었다. 나는 팔과 등의 근력과 버티는 힘을 사용하는 이 운동에 재능도 소질도 없었고, 심지어 그냥 평범한 수준도 못되었다. 그래도 5개월 동안 꾸준히 주 2회씩 나갔다. 꾸준히, 겨우, 남들이 2개월 정도면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나보다 늦게 시작한 회원들이 중급 수업을 듣고 전문가반을 등록하는 동안, 나는 입문에 머물러 있었다. 언젠가 초급이 되긴 할까? 그런 마음으로 6개월 재등록을 했다. 그리고 재등록 후 첫 수업 날, 폴에서 떨어지며 왼발목을 접질렸다. 아픈 와중에도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라고 말할 수준은 된 다음에 떨어져야 할 거 아냐. 


좌 발목 염좌. 2주 반깁스 필요. 오른쪽 발목, 오른쪽 팔꿈치에 이은 세 번째 깁스였다. 깁스를 하고 망원역 앞에 서서 생각했다. 뭔가를 배울 때, 한 번은 넘어져야 하는 게 맞나? 나만 넘어지고 있는 거 아니야?


그날, 원고 때문에 대화를 나누던 지인이 자신도 발목을 다쳤다고 했다. 세상에! 저도 운동하다 다쳤는데. 뭐 하다 다치셨어요? 그분은 클라이밍이었다. 그랬구나! 그분은 아무래도 걷는 게 불편해서 목발을 샀다고 했다. 당근마켓에서, 2천 원에. 작가님, 목발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저는 일주일 지나서 이제 일주일 남았거든요.


배우면서 꼭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꼭 그렇게 티를 내는 사람들. 덤벙거리고 서툴고 조심성이 없고 흥분을 잘하고 마음과 성격이 모두 급한 사람들. 저번에 다쳤을 때 사둔 의료용 반창고가 어디 있나 뒤적이면서, 그래 뭐 나만 넘어지는 건 아니네 하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목발이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지지대가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신호등이 너무 빨리 꺼져요, 깁스용 신발은 보관해두려고요, 하면서 계속하는 거지 뭐. 


한참 늘지 않을 때, 선생님이 힘을 준다고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늘 거예요. 제가 회원님을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남들이 보면 뭐 되게 비장한 걸 하는 줄 알겠지만, 겨우 그날 배운 걸 그날 해내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저는 꾸준히 하잖아요." 마흔을 목전에 두고, 나는 잘하는 법 말고 계속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못하는 걸 꾸준히 하면 뭐가 달라지는지 알고 싶다. 열흘 뒤에는 깁스를 풀고 다시 운동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까 라이언 고슬링, 너는 조용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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