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치킨 식문화에 대한 사심 가득 고찰
‘치느님’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던 때가 생각난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치킨을 신에 비유할까 싶다가도, 어느새 수긍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후로도 ‘치맥’은 물론, ‘치맥지교(치킨과 맥주로 우정을 나누다)’, ‘치믈리에(치킨감별사)’ 등 신조어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치킨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필자 역시 치킨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YOMA> 8월호의 주제가 ‘식문화 트렌드’로 정해진 순간 꼭 치킨에 대한 글을 쓰겠노라고 다짐했다.
치킨은 어쩌다가 이렇게나 우리의 마음을 흔들게 되었는지, 또한 오늘날 치킨이라는 콘텐츠는 어떤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소비되고 있는지 심도 있는 고민을 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에 보고 싶었던 우리의 소울푸드 치킨에게 바친다.
우리나라에는 치킨집이 정말 많다. 2013년 기준으로 전 세계 맥도널드 개수가 약 35,400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치킨집만 세어 봐도 무려 36,000개가 넘는다. 도대체 치킨집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이토록 많이 생기게 된 걸까?
우리나라 최초의 치킨은 1960년대에 서울영양센터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다만, 그 당시의 치킨은 지금과 같은 바삭한 튀김옷을 입은 치킨이 아닌 전기구이 통닭이었다. 우리 부모님의 어린 시절, 퇴근길에 아빠가 사 오셨다던 통닭이 이런 형태의 통닭이었을 거다.
조각조각 나눠진 오늘날의 후라이드 치킨은 1977년 국내 최초의 치킨 프랜차이즈 ‘림스치킨’이 선보이면서 등장했고, 1980년대에는 국내에 잘 정착한 치킨이 ‘양념치킨’처럼 한국 정서에 맞게 개발되기 시작했다. 양념치킨의 탄생은 결국 ‘반반 무 많이’라는 우리나라 특유의 식문화로 발전했다.
치킨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건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수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는데, 그나마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치킨집이었다. 한정된 자산으로, 특별한 기술 없이 시작할 수 있었던 치킨집에 많은 사람이 몰리며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치킨집이 늘어가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다. 기억하는가, 그 당시 대한민국은 어디를 가도 축제의 현장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4강 신화를 목격했고, 치킨집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이때를 전후로 1만여 개에 이르던 치킨집이 2만 5000여 개로 급증했다. 또한, 이때 이후로 치킨은 일종의 ‘축제의 음식’이 되었다.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 때 치킨 주문을 시도해 본 용자라면, 충분히 실감했을 거다.
이처럼 치킨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일상에 녹아들었다. 이러한 사연(?)은 물론,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현지화에 성공했고, 치킨을 먹기 좋은 인프라까지 갖춰져 있다. 게다가 파닭, 간장치킨, 스노윙치킨 등 다양한 메뉴 개발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외식 메뉴 1위를 놓치려야 놓칠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치킨은 단순히 음식뿐만 아니라 하나의 문화, 하나의 트렌드로 발전하고 있다. 얼마 전 재미있는 설문조사를 하나 보게 되었는데, 대학내일20대연구소에서 진행한 ‘밀레니얼 세대의 식생활 및 식문화’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국인에게 추천하고 싶은 한국 음식’ 1위로 치킨이 선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 추천하고 싶은 한국음식문화’ 2위에 한강에서 치맥이 선정되었다.
소위 ‘젊은 층’에 해당하는 밀레니얼 세대에게는 한식으로 대표되던 비빔밥이나 불고기, 김치보다 치킨이나 삼겹살과 같은 ‘본인이 자주 먹고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에 더 자부심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를 입증하듯이, 올해 역시 치킨은 하나의 ‘콘텐츠’로서 다양한 방면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올해는 이 맛있는 콘텐츠가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1. 케미장인 치킨의 변신 - 치밥과 치면
누군가 21세기를 융합의 시대라고 했던가, 케미장인 치킨 역시 예외는 아니다. 치킨 고유의 매력을 살리며 새로운 형태로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콜라보’ 제품들이 눈길을 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치밥’인데, 직접 만들어 먹던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가정간편식(HMR) 제품으로 등장해 혼밥족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바로, ‘굽네 볼케이노 치밥’이 그 주인공이다.
치밥이라는 개념은 2015년에 굽네 볼케이노가 출시되며 생겨났다. 굽네 볼케이노 특유의 매운 양념에 밥을 비벼 먹는 영상이 SNS에 회자되면서 큰 인기를 끈 것이 치밥의 시초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치밥을 먹기 위해서는 매번 치킨을 시켜 먹어야 하고, 그 후에는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한다는 단점도 분명 존재했다.
이번에 출시된 ‘굽네 볼케이노 치밥’은 이러한 단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굳이 치킨을 시켜 먹지 않더라도 누구나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미 치열한 볶음밥/가공밥 시장에서 ‘치밥’이라는 차별화를 두었고, 결국 출시 10일 만에 초도 물량 1만 개가 완판 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 외에도 ‘굽네 갈비 천왕 치밥’, ‘굽네 닭가슴살 김치볶음밥’도 함께 출시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치밥뿐만 아니라 ‘치면’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치면은 ‘양념치킨+라면’을 의미하는데, 치밥과 마찬가지로 치면을 먹기 위해서는 매번 양념치킨을 주문해야 한다는 불편함에서 탄생했다. 농심에서 출시한 ‘양념치킨 큰 사발면’은 치면의 대표적인 제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직접 먹어보니 매우면서도 달달한 맛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치밥과 치면의 사례처럼 여럿이서 함께 먹던 대표적인 외식 메뉴 치킨도 1인 가구, 혼밥족, 편의점족 등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등장에 따라 변화를 맞이했다. 특히나 음식과 관련된 제품 개발이나 마케팅은 일상에 가장 밀접한 의식주 중 하나인 만큼, 부지런한 관찰과 빠른 실행이 더욱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 이겼닭! 오늘 저녁은 치킨이닭! - 배틀그라운드
배틀그라운드, 정말 오랜만에 초 대박이 난 국산 게임으로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거다. 특히 지난 6월에는 아프리카TV의 배틀그라운드 리그인 ‘Pro Tour’ 시즌2가 시작되며 더욱 화제가 되었다. 공인 프로팀 35개 팀과 중국 초청 4개 팀, 그리고 예선 통과 1개 팀 등 총 40개 팀이 참여하는 큰 규모의 이벤트인데, 본 대회에 공식 후원사로 나선 곳은 다름 아닌 ‘네네치킨’이다.
배틀그라운드를 해본 이들은 왜 치킨 브랜드가 공식 후원사가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텐데, 바로 게임에 직접 등장하는 ‘치킨’이라는 용어 때문이다. 본 게임에서 1위를 차지하면 ‘이겼닭! 오늘 저녁은 치킨이닭!’이라는 축하 멘트(?)가 표시된다. 그동안은 멘트만 보고 끝이었다면, 이번 대회에서는 실제로 치킨 브랜드가 치킨을 후원한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네네치킨은 대회 현장에서의 치킨 제공뿐만 아니라 바이럴 영상 공유 이벤트를 진행하는 등 활발한 마케팅을 진행했다. 배틀그라운드의 ‘치킨’ 축하 멘트는 재미있는 언어유희에서 벗어나 하나의 콘텐츠이자 브랜딩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아마도, 치킨이 아니라 다른 음식이었다면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하며, 오늘 밤에는 배그 한 판 하고 치킨을 시켜 먹어야겠다.
3. 치킨 마케팅계의 최종 보스 - 배달의 민족
치킨에 대해 논하면서 이들을 빼놓을 수 있을까? 치킨 마케팅계의 최종 보스라고 할 수 있는 ‘배달의민족’은 올해 더욱 치킨에 집중했다. 치킨계 소믈리에인 '치믈리에' 자격시험을 열고, 치킨과 잘 어울리는 맥주 '치믈리에일'을 개발하는가 하면, 더 나은 치킨 생활을 위한 안내서 '치슐랭가이드'까지 출판했다.
역시나 남다른 배달의민족의 치킨 행보(?)를 하나씩 뜯어본닭.
1) 배민 치믈리에 자격시험
치믈리에 자격시험은 '치킨은 왜 감별사가 없지?'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작년에 열린 첫 대회부터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니더니, 얼마 전 개최된 제2회 치믈리에 시험은 그 경쟁률이 54:1을 기록하며 그 인기를 실감하게 했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실제 민간자격증이 발급되는 만큼, 올해 시험은 사전 모의고사-필기-실기 등 관문을 갖추었고, 1회보다 난도가 더욱 높아졌다고 한다.
실제 시험에 나왔던 문제 몇 개를 소개할 테니 한 번 풀어보자.
2) 치슐랭 가이드
한편, 제2회 치믈리에 자격시험 기간에 맞물려 치킨 정보를 집대성한 책 '치슐랭가이드'도 등장했다. 전년도 시험에서 자격을 얻은 치믈리에 119명이 함께 고민한 치킨을 고르고 즐기고 배울 수 있는 비법을 담았다. 표지 컬러부터 치킨의 아름다운 튀김옷을 연상케 한다.
치믈리에가 뽑은 베스트 치킨부터 남은 치킨 활용법, 치킨과 어울리는 술 등 치킨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치킨 프랜차이즈의 역사나 후라이드 종류와 같은 상식도 확인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치킨계의 바이블, 치킨계의 백과사전이라는 칭호도 아깝지 않다.
직접 읽어보니, 역시 ‘배민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렇게 특정한 스타일에 ‘배민스럽다’를 떠올린다는 사실에 그들이 얼마나 브랜딩을 잘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목차를 보기 전까지는 그저 맛있게 먹는 법 정도를 떠올렸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목차의 디테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차만 봐도 정말 치킨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대체로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지만, 정말 센스 있다고 느낀 부분은 바로 데이트 코스다. 지역별 데이트 코스를 약도와 함께 풀어놓았는데, 기-승-전-치킨 구성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데이트나 여행할 때 치킨집은 잘 안 갔었는데, 치믈리에들이 추천하는 곳인 만큼 한 번씩 다녀보고 싶다.
3) 치믈리에일
배달의민족은 치킨뿐만 아니라 치킨의 영원한 동반자 ‘맥주’ 개발에도 나섰다. 수제맥주 브랜드 ‘더부스’와 손잡고 치킨과 가장 잘 어울리는 한국 맥주 ‘치믈리에일’을 만들었다. 이러한 행보는 앞서 소개했던 대학내일20대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와 일맥상통한다. 단순히 배달 음식 치킨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영역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식문화인 ‘치맥’으로 확장한 것이다.
이처럼 배달의민족이 치킨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역시나 배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치킨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치킨은 대중과 소통하고 즐기기는 콘텐츠 소재로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배달의민족은 그러한 콘텐츠를 널리 배급할만한 인프라를 잘 구축하고 있다. ‘비욘드 치킨(치킨을 넘어서)’이라는 배민라이더스의 첫 캐치프레이즈처럼, 그들의 행보는 치킨을 넘어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예전만큼 다 같이 둘러앉아 치킨 한 마리 나눠 먹는 정감은 줄어들었지만, 치킨은 여전히 매력적인 음식이자, 문화이자, 콘텐츠다.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경제적 상황이나 라이프스타일은 변했지만, 치킨은 여전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질리도록 먹었는데도, 질리지 않는 것을 보면 확실히 치킨에는 피자, 햄버거가 갖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는 아마 여러 세대에 걸쳐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즐거움’ 일거다. 부모님 세대의 전기구이 통닭을 기다리던 설렘, 닭다리 들고 응원하던 월드컵의 열정, 지인들과 한강에서 소소하게 즐기는 치맥의 추억까지. 신기하게도 치킨에는 수많은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다. 누구나 간직하고, 공감할 수 있는 즐거움으로 인해 치킨은 더욱 쉽게 접하고, 나눌 수 있는 좋은 콘텐츠가 되었다.
앞으로도 치킨과 함께 다양한 추억을 만들고, 문화를 즐기며, 콘텐츠를 소비하고 싶다. 아니면 오늘의 이 글처럼, 치킨에 대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즐거운 추억이 될 거다.
* 본 콘텐츠는 마케팅 스터디 매거진 <YOMA> Vol.5의 콘텐츠입니다. 더 다양한 콘텐츠는 <YOMA>에서 확인해주세요!
** 본 글에 나왔던 ‘배민 치믈리에 자격시험’ 문제 정답은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해주세요 �
④ 페리카나 / ③ 미국농장에 거주한 아프리카 노예 / ① 노랑통닭 고바치 – 고추장 바비큐 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