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평온의 연말연시를 지나
겨울이 오기 무섭게 제안 시즌이 시작되었고,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30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글은 반도의 흔한 에이전시 마케터의 회고이자,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가버린 4개월에 대한 한풀이이며, 허락 없이 찾아온 30대에 대한 담담한 새해인사다.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게
1.
연말은 제안의 연속이었다. 한 프로젝트의 제안서를 제출하고 나면, 바로 다음 제안 참여가 진행됐다. 매주마다 제안 일정이 있었고, 제안이 몰린 주에는 경쟁 PT만 두 탕을 뛰었다. 물론, 내가 모든 제안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쉼 없이 돌아가는 팀의 분위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이제는 숨을 헐떡이다가도 금방 숨을 고를 수 있는 담담함이 생겼다.
매년 반복되는 ‘연말=제안’의 공식도,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다. 몇 해 전만 해도 제안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두려웠는데, 지금은 ‘올 것이 왔구나’하며 준비하게 된다.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일을 하다 보면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몸도, 마음도 인정하게 된 듯 싶다. 마음가짐이라는 것도 연차가 쌓일수록 단단해지나 보다.
잡생각 없이 제안에 임해서일까, 참여했던 제안 대부분을 수주했다. 무엇보다 기존에 운영하던 프로젝트의 대부분을 연장 계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화기애애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제안 시즌은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다만, 이렇게 기쁜 소식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나를 보며 놀라울 따름이었다.
2.
정신없이 연말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2018년의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틈틈이 짬을 내 송년회를 핑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이제 20대가 다 갔다고, 계란 한 판이 말이 되냐며 아쉬워하는 친구들의 말에 나도 한 마디 거든다. 나이 먹는 것에 점차 무뎌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20대를 보내는 건 아쉬웠다.
참 즐거웠고, 다사다난했던 20대의 마지막을 기념하며 프로필 사진을 촬영했다. 혼자였으면 쉽게 도전하지 못했을 텐데, 먼저 하자고 해준 친구 덕분에 용기를 냈다. 그만큼 이 나이를 보내는 것에 미련이 남았나 보다. 제안하느라 야식 먹는다고 다이어트는 못했지만, 친구와 함께 20대의 모습을 남겼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프로필 사진을 촬영하고 며칠 뒤에는 휴가를 냈다.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이었는데, 특별하게 뭘 할 것은 아니었지만 마지막 날 만큼은 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연말이라고 하면 어디를 놀러 가거나, 아니면 지난 1년을 돌아보는 글을 쓰는 등 나름의 기념을 했을 텐데 올해는 아무것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한 살을 먹는 것도 아니고, 앞자리의 수가 바뀌는 변화임에도 생각보다 담담했다.
유난스럽지 않게 담백하게 보내고 싶었다. 그저 집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지난 추억이 가득한 곳에서 직접 썼던 글을 읽어보고, 답답하면 동네 한 바퀴 마실을 다녀왔다. 심지어 매년 챙겨보던 새해 카운트다운도 씻느라 놓쳤다. 그렇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담담하면서 담백하게 새해를 맞이했다.
3.
2019년 1월의 마지막 날, 여전히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 작년 연말에 수주한 프로젝트에 대해 초반 작업을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고, 송년회 때 보지 못했던 친구들을 신년회라는 핑계로 만나기 바쁘다. 이번 달에만 면접을 다섯 번을 진행했고, 영화만 아홉 편을 감상했다. 그리고 어느새, 마케팅 잡지에 실리던 나의 기고글도 마지막 원고만을 남기고 있었다.
- 마케터님 글은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어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했습니다.
그동안 좋은 글 저희 잡지 지면에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힘이 되는 새해 인사였다. 한동안 모든 것에 너무 담담한 것이 아니었나 내심 걱정이었는데, 기자님의 한 마디에 생각이 전환되었다.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다’는 말은, 30대를 맞이한 나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준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30대를 맞이함과 동시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