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새로운 영역에 눈을 뜨다
한 달 전, 무려 전국노래자랑에서 손담비의 ‘미쳤어’를 부르던 ‘할담비’ 지병수 할아버지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공연 영상이 조회수 200만을 넘기는가 하면, 원곡 가수 손담비가 화답 영상을 올리는 등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광고까지 찍을 정도로 세대를 아우르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지병수 할아버지의 사례를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으로 생각하기에는 요즘 ‘시니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젊은 사람들만 가능할 줄 알았던 1인 미디어 시장에 ‘실버 크리에이터’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버 크리에이터가 계속 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고령층 인구 자체가 늘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시니어 인구는 지속해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대로라면 2025년 이후 시니어에 해당하는 65세 이상이 인구의 20%를 넘어선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라고 한다.
2018년 한국인터넷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60대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81.2%, 70세 이상도 31.2%에 이를 정도로 시니어도 스마트폰 사용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비록 젊은 세대에 비교하면 미숙할 수 있지만, 지자체 등에서 실시하는 시니어 대상 교육으로 금융 등 서비스를 활용하는 노년층도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SNS를 통해 시니어와 젊은 세대의 소통이 늘어난 것도 영향이 있다. 스마트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시니어는 메신저 등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SNS 등을 개설하고,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교류를 통해 시니어 층이 젊은 세대의 문화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콘텐츠 제작에 직접 참여하려 시도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1인 크리에이터는 게임, 패션, 먹방 등 자신들의 관심사를 콘텐츠화해 대중과 소통한다. 그렇다면 실버 크리에이터들은 주로 어떤 콘텐츠로 대중에게 다가갈까?
사실, 시니어 세대를 주제로 한 콘텐츠가 주목을 받은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예능 <꽃보다 할배> 등 시니어가 등장하는 콘텐츠는 그들의 오랜 경험과 진실된 모습을 나누며 소비자에게 다가가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다만, 이러한 콘텐츠는 어디까지나 그들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시선과 생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1인 미디어 시대의 실버 크리에이터는 이러한 콘텐츠와 궤를 달리 한다. 이들은 콘텐츠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콘텐츠로 제작해 구독자와 소통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젊은 세대 크리에이터와 다르지 않다. 다른 세대의 문화를 이해하고 소통이 이어지는 것은 다음 단계다. 실버 크리에이터의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세대 간 거리감이 줄어들고, 그 이후 시니어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조금씩 변해가게 마련이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들이 시니어 세대에게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매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젊은 세대와는 다른 언어와 감성은 그들의 콘텐츠에 매력을 더한다. 젊은 세대에게 흔한 주제 대신 '계모임 메이크업', ‘치과 들렀다 시장 갈 때 메이크업’ 등 친근하고 재미있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내는 박막례 할머니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보다 30~40년 더 살아온 세월에서 온 경험담과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에 수많은 팬이 열광하며 ‘좋아요’를 누르게 만든다. 70년 인생 자제가 콘텐츠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서 실버 크리에이터가 활약하고 있는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여러분의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실버 크리에이터를 만나보자.
한국의 ‘닉 우스터’라 불리는 꽃할배
한국의 ‘닉 우스터’로 불리며 인스타그램에서 5만 팔로워가 넘는 ‘패셔니스타’로 유명한 여용기 할아버지도 최근 유튜브를 시작해 화제가 되었다. 올해 나이 66세지만 젊은 세대 못지않은 패션 감각을 뽐내는 여용기 할아버지는 부산 중구 남포동의 유명 스타다. 40년 이상 경력을 가진 베테랑 재단사로 일하다가 기성복에 밀리면서 일을 그만뒀었는데, SNS에 일상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올리면서 유명해졌다.
유명세 덕분에 2015년에는 이탈리아에 가서 세계적인 남성복 박람회 <피티 우오모(Pitti Uomo)>에도 참가하는 경험도 누렸다고 한다. 유튜브 채널 ‘꽃할배TV’를 통해 패션 센스를 보여주는 패션 브이로그 콘텐츠, 부산의 맛집을 소개해 주는 콘텐츠 등을 진행하고 있다.
▶ 여용기 할아버지의 유튜브 <꽃할배tv>
먹방 트렌드를 선도하는 영원씨
이제는 조금 흔해졌다 싶은 유튜브 먹방 중에서도 유독 눈길이 가는 먹방이 있다. 올해로 82세 최고령 먹방 유튜버 김영원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영원씨01seeTV'다. 다른 먹방 유튜버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먹는 것도, 신기한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아무 말 없이 음식을 먹고 행복해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시청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렇다고 콘텐츠가 안 좋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지난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영원씨의 자메리카 통다리' 영상은 조회수 117만 회, '영원씨의 불량식품 먹기' 영상은 조회수 105만 회를 기록했을 정도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남기기 위한 손녀의 예쁜 마음이 어느새 먹방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인생과 게임은 실전이지! 게이머 GrandPaGaming
세 번째 주인공은 게임을 주제로 하는 실버 크리에이터 ‘GrandPaGaming(할아버지 게이밍)’이다. 이분은 유튜브와 트위치에서 게임 스트리머로 활동하고 있는 할아버지인데, 크게 주목받는 이유는 65세의 나이가 아닌 ‘뛰어난 게임 실력’이라고 한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미 해군 출신이었던 그는 실제 전장의 전략을 게임에 적용하는 등 오랜 세월 체득한 경험을 활용해 EA의 최신 게임 ‘에이펙스 레전드’부터 ‘배틀그라운드', ‘폴아웃4’ 등 다양한 슈팅 게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심지어 게임 플레이 하이라이트가 영상으로 공유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는 게임 실력을 바탕으로 컴퓨터 회사 광고까지 섭렵하면서 대표적인 글로벌 실버 크리에이터로 주목받고 있답니다. 역시 인생과 게임은 실전인가 보다.
리틀 포레스트의 실사? 반찬 ASMR 최강자 심방골주부
영화 <리틀 포레스트> 주인공이 할머니였다면 이분을 모티브로 했을 것 같다. 40년 차 내공의 주부 조성자 할머니는 최근 예능 프로그램 <랜선 라이프>에 출연하면서 화제가 된 실버 크리에이터다. ‘심방골주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의 콘텐츠는 다른 요리 유튜버처럼 설명 한마디 없이, 오로지 채소를 다듬고 음식을 볶는 소리로 가득한 영상이다.
긴박한 BGM이나 효과음을 대신하는 자연의 소리가 절로 군침을 돌게 만든다. 입맛 없을 때도 밥 생각나게 하는 ASMR이 가득한 심방골주부 유튜브 채널, 다이어트가 필요한 분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채널이 되시겠다.
흔히 젊은 세대와 시니어가 생각과 경험의 차이로 인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세대 간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다양한 연령층의 크리에이터가 선보이는 콘텐츠를 편견 없이 감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서로를 이해하고 응원하는 가장 좋은 소통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더 다양한 실버 크리에이터가 나타나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줬으면 싶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부모님과 실버 크리에이터의 콘텐츠를 함께 시청하며 서로의 의견을 가감 없이 나눠 보는 날이 올지도.